4050 여성들 잇단 미투 선언…늦은 고발? 묵혀온 고통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뒤늦은 고발 아니다 너무 오랜 고통이다

자신이 속한 조직 피해 줄까 침묵 #사회가 날 지켜줄까 고민도 많아 #법조·문화계 등 전방위 폭로 확산 #가해자 상당수 각 분야의 권력자 #이윤택 사과하며 “나쁜 관습” 주장

4050 여성들의 ‘미투’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극장 30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극장 30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수십여 년간 ‘연극계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해 온 이윤택(66)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연극연출의 거장 입에선 ‘더러운 욕망’ ‘사죄’ ‘참담’ 등의 단어가 흘러나왔다. 19일 자신이 가해자로 지목된 성폭력·성희롱 의혹 사건에 대한 사과 기자회견장에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위를 “극단 내에서 18년간 관습적으로 일어난 아주 나쁜 형태의 일이었다”고 표현해 논란을 키웠다. 황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윤택씨의 경우에서 보듯 ‘나쁜 관습’이라는 그릇된 성의식에 기대는 한 피해자에게 가한 폭력의 실체를 직시하기는 불가능하다”며 “가해자 스스로 관습의 장막을 걷어내고 성의식을 바꿔야 희망이 생긴다”고 말했다.

법무부 고위간부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 [우상조 기자]

법무부 고위간부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 [우상조 기자]

서지현(45) 통영지청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 피해 폭로 이후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검찰을 넘어 정치·문학·연극계 등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안태근(52) 전 법무부 검찰국장을 필두로 고은(85) 시인, 홍준표(64) 자유한국당 대표 등이 지탄과 논란의 대상이 됐다. 대부분은 각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거나 상당한 권력을 구축한 50대 이상 남성들이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들의 안이한 성의식은 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해 직장인 11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연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보고서에 따르면 ‘성희롱을 당한 사람은 그럴 만한 행동을 한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100점을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남성은 32점, 여성은 20.8점이었다. 형사정책연구원은 “응답자의 연령과 근무경력이 많을수록 ‘성희롱은 여성의 과민반응’이라고 생각하는 통념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관련기사

현실이 이렇다 보니 ‘내가 속한 조직에 피해가 갈까 봐’ ‘업계 내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봐’ 오랫동안 피해자들이 숨죽이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서 검사의 폭로를 계기로 최영미(57) 시인 등 40대 이상 여성들의 목소리가 잇따라 쏟아져 나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은 “각자 속한 조직 내에서의 성폭력이 오랜 기간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지만 조직 내 일원들은 침묵했다”고 말했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자신의 억울함을 드러냈을 때 ‘사회가 날 지켜줄 수 있을까’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없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결심하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이 필요했을 것”이라며 “결국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뒤늦은 폭로’가 아닌 오랜 시간 묵혀 온 ‘고통’의 드러냄이다”고 설명했다. 성폭력 피해 상담 전문기관인 ‘한국여성의전화’에도 40~50대 중년 여성들의 제보 전화가 요새 부쩍 늘었다고 한다.

홍상지·송우영·홍지유 기자 hongsa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