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유런 만난 리잉, 한눈에 반해 “결혼하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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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호 28면

1 장리잉에게 천유린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1930년 가을, 파리 교외.

1 장리잉에게 천유린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1930년 가을, 파리 교외.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17>

신해혁명으로 청(淸) 황실은 무너졌지만 혁명을 상징하던 쑨원(孫文?손문)은 군벌들에게 이리 차이고 저리 차였다. 소련에서 10월 혁명이 발발했을 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쑨원 부인이 천유런에게 리잉 소개 #장징장은 노발대발하며 결혼 반대 #“민생주의, 공산주의와 다를 바 없다” #천유런 “러시아와 협력” 쑨원 설득


 외교관계를 담당하던 천유런(陳友仁?진우인)이 쑨원에게 건의했다. “레닌에게 집권 축하 서신을 보내자. 소련 외교부 장관과 안면이 있다. 관계 정립을 타진해보겠다.” 쑨원은 알았다며 입맛을 다셨다.

 천유런은 레닌에게 보내는 편지를 조수에게 건넸다. “프랑스 조계에 가서 우체통에 넣고 와라.” 외교부 장관에게 보낼 편지는 직접 들고 미국으로 갔다. 믿을 만한 화교 거상 한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었다. “이 편지가 안전하게 모스크바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라.”

 소련은 반응이 없었다. 마르세유 회담에 혁명정부 대표로 참석한 천유런은 소련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어찌나 음흉한지 속내를 알 길이 없었다. 귀국길에 가족을 만나러 런던으로 갔다. 트리니다드에 있는 부동산을 처분하고 독서에 매달렸다. 마르크스의 저술과 영국노동운동사,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들을 끼고 살았다. 머리가 정리되자 결론을 내렸다. “영국 노동당이 하원에서 의석을 차지한 것은 의회민주주의의 유구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중국에 적합하지 않다. 중국은 지도자의 역량이 중요하다. 탁월한 지도자를 만나면 힘들어도 보람이 있다. 무능하고 고집만 센 지도자는 국민을 피곤하게 한다. 중국의 농민과 노동자들은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는 지도자를 선호한다. 현재 중국은 국가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중요하다. 개명(開明)한 독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2 장징장과 조강지처 야오후이(姚蕙). 연도 미상. [사진=김명호 제공]

2 장징장과 조강지처 야오후이(姚蕙). 연도 미상. [사진=김명호 제공]

하루는 영국 노동운동 지도자가 천유런을 찾아왔다. 신문 한 장을 내밀었다. 소련 외교부 차관 카라한이 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발표한 ‘중국 인민에 고하는 선언문’이 실려있었다. “소련은 중국의 진정한 친구가 되기를 갈망한다. 중국 인민이 소련 인민처럼 베르사유회의 협약국들의 지배를 거부하고, 제2의 조선이나 인도인처럼 식민지 전락을 반대하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다면 소련의 노동자와 농민, 붉은 군대는 그들의 유일한 맹우와 형제가 될 것이다. 제정러시아 시절 중국을 협박해서 얻어낸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천유런은 “볼셰비키와의 합작이 가능하다”며 흥분했다. 영문으로 번역한 카라한 선언문을 쑨원에게 보냈다. 귀국도 서둘렀다.

 쑨원은 거부의사를 밝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중국의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농업이건 공업이건 자본이 필요하다. 우리가 필요한 자본은 서구 쪽에서 찾아야 한다. 소련과 합작하려면 사상적 준비도 중요하다.”

 천유런은 쑨원이 제창한 민족·민권·민생 삼민주의(三民主義)중 민생주의를 새롭게 해석했다.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창조물이 아니다. 인류의 원시사회는 공산사회였다. 민생주의의 최종목표는 공자(孔子)가 꿈꾸던 대동세계(大同世界)의 실현이다. 링컨이나 마르크스의 생각이 공자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쑨원선생의 민생주의도 공산주의와 다를 바 없다.” 쑨원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듯하다. 내가 바라던 내용이다. 정치는 말장난이다. 소련과 연합하면서 서구열강과 대립할 필요가 없다. 두리뭉실하게 누구나 기대를 갖도록 하는 것이 노련한 정치가다.”

 쑨원과 소련의 관계가 밀접해지기 시작했다. 쑨원은 소련이 제의한 중국공산당과의 합작도 받아들였다. 모든 문건은 영문으로 주고받았다. 영어는 천유런의 모국어였다. 밤낮으로 쑨원을 대하다 보니 쑹칭링(宋慶齡?송경령)과 만나는 횟수도 늘어났다. 어른이건 애건, 남녀가 자주 만나다 보면 은원(恩怨)이 싹트기 마련이다.

쑨원이 세상을 떠나자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부상했다. 공산당과 결별하고 당원들 숙청에 나섰다. 천유런은 쑹칭링과 연명으로 쑨원의 유지를 배신한 장제스를 성토했다. 쑹칭링이 소련행을 택했을 때도 동행을 자청했다. 쑹칭링과 쑨원을 분리시키려는 국민당 우파에겐 이런 호재가 없었다. 결혼설이 전국에 파다했다. 스탈린도 천유런을 실망시켰다. “중국에 돌아가서 장제스와 합작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천유런은 모스크바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프랑스로 발길을 돌렸다. 배웅 나온 쑹칭링이 천유런에게 당부했다. “장징장(張靜江?장정강)은 슬하에 딸만 열 명이다. 넷째 딸 리잉(?英?여영)이 제일 예쁘다. 지금 파리에 있으니 만나봐라. 나는 독일로 가겠다.”

 천유런을 만난 리잉은 한눈에 반해버렸다. 아버지에게 천유런과 결혼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장징장은 노발대발했다. “천유런이 몇 살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너보다 31년 전에 태어난 놈이다.” 장징장의 딸들은 개성이 강했다. 단 한 명도 아버지가 점찍은 청년과 결혼하지 않았다.

 정부 주석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가 끼득거리며 장징장을 진정시켰다. “너나 나나, 따지고 보면 반역자다. 딸들이 너 닮은 게 뭐가 잘못이냐. 네 부인이 한눈 팔지 않았다는 증거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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