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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 타협’ 압박 미 특사 마셜 “장제스·마오쩌둥 설득 자신”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8〉 일본 투항 후 중국에는 미군이 넘쳤다. 베이징을 상징하는 고궁 상공에 오가는 미군 항공기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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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기습의 귀재 린뱌오 “전쟁해야 평화의 문 열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7〉 이동 중인 동북자치군 치중대(輜重隊). [사진 김명호] 아직도 이런 말을 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일본 패망 후 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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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린뱌오에 “평화는 회담 아닌 전장의 산물” 전문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6〉 장제스는 두위밍을 끔찍이 아꼈다. 국방부장을 대동하고 동북 주둔 중인 두위밍 군을 독전하는 장제스. [사진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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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동북 패권 쟁취 후 대문 닫아라” 린뱌오에 전문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5〉 장제스와 두위밍(오른쪽). [사진 김명호] 일본 패망 3주 후 1945년 9월 14일 오후, 홍색 수도 옌안(延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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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린뱌오 끝까지 추적해라” 미군 수송기 행적에 촉각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4〉 태평양전쟁 기간, 버마 파견군 시절의 두위밍(오른쪽 첫째). 왼쪽 첫째는 윈난성 주석 룽윈. [사진 김명호] 중·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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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부산시장 인터뷰] 60조 가치 엑스포, 올림픽·월드컵처럼 전 국가적 협조 필요
━ 2030 엑스포 유치 ‘전투모드’ 박형준 부산시장 박형준 부산시장은 부산 엑스포의 경제적 가치가 60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승 객원기자 17명의 시도지사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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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가 키운 린뱌오의 팔로군, 일본군 1000명 몰살시켜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3〉 동북에서 국·공 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이 마샬(오른쪽 다섯째) 원수를 특사로 파견해 조정에 나섰다. 오른쪽 여섯째가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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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만주군과 생사 겨룬 적 드문 김일성, 선전전엔 능해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2〉 린뱌오가 직접 지휘한 슈수이허 전투 승리를 자축하는 동북자치군. 이상한 무기 두 발로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미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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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궈, 소련군에 “몰수 기관차·화폐 등 반환을” 당찬 요구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1〉 루스벨트 사망 1주일 후 신임 대통령 트루먼(오른쪽 셋째)과 회담을 마친 중국 외교부장 쑹즈원(오른쪽 둘째).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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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무기 다룰 줄 알아야” 스탈린, 장징궈에 권총 선물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0〉 중·소 우호 동맹조약은 파행을 반복했다. 1945년 8월 7일, 소련의 동북 출병 전날 타결됐다. 소련 외상 몰로토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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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기자 “만주국 외교권 없어, 푸이는 관동군 허수아비”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9〉 만주국은 1938년 이탈리아와 수교했다. 수교기념으로 평화 대표단을 로마에 파견했다. 무명용사 묘지를 참관하는 만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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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한족·조선인 서로 잘못해 충돌 땐 한족 억눌러라”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8〉 일본 패망 전, 중공은 옌안에 있던 영화 관련자들을 동북(만주)으로 파견했다. 만영을 접수해 동북영화제작소(東影)을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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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마을 축소판…‘숙녀의 방’같은 유명 공간 있어야
━ POLITE SOCIETY 남아프리카공화국 랜저랙 호텔의 서재. 마을 도서관이 호텔에 구현된 형태다. [사진 박진배] 뉴욕에 아주 특별한 호텔이 하나 있다. 일반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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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3종류 과자 중 큰 것 버리고 작은 것부터 먹자”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7〉 무명 화가가 판화로 재현한 1945년 10월 1일 동북영화공사 성립 선포식. [사진 김명호] 1945년 8월 14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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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샹란 첫 도쿄 공연에 “3등 국민 주제에 제법” 열광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6〉 일본 패망 후 동북에 내걸린 연합국 수뇌들의 초상. 왼쪽부터 스탈린, 애틀리, 트루먼, 장제스. 1945년 겨울 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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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카스, 연회에 여배우 부른 고관 목도로 두들겨 패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5〉 관동군의 전성기는 태평양전쟁 발발 전까지였다. 1940년 가을 펑톈(奉天) 거리의 관동군. [사진 김명호] 관동군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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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샹란, 노래·연기로 관동군 사기 진작 총살 감”소문 무성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4〉 화베이 공략을 위해 만주를 출발하는 관동군. [사진 김명호] 1945년 8월 15일 오후 상하이, 일본 투항 소식과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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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샹란에 홀린 아마카스 “연기 못하는 가수 없어” 영입 지시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3〉 젊은 시절, 리샹란은 나이에 비해 조숙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그 반대였다. 1940년 20세 때 만영 직원들과 베이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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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항일 토비 ‘홍창회’ 머물던 촌락 주민 3000명 도살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2〉 1930년대 푸순의 노천 광산. 일본은 러·일 전쟁 승리 후부터 40년 동안 석탄 2억t을 일본으로 반출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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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노래·연기 일품 리샹란 숨지자, 중 “중·일 우호 공헌”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1〉 만주영화공사 대표단과 서울(당시는 경성)을 방문한 리샹란(앞줄 중앙). 이 사진으로 한국인이라 오인한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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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 약탈에 목맨 만철, 조선·중국인 노동자 이간책 써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0〉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다롄항의 만철 전용부두. 매년 3500척의 선박이 650만t의 화물을 토하고 삼켰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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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여학생 500명 창고에 가둬 빵으로 세균전 실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9〉 만주국 시절 하얼빈의 중심가. 주변에 백계 러시아인과 유대인이 개설한 상점과 일본백화점이 몰려있었다. [사진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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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러 군민 상대 ‘광야의 꽃’ 가라유키, 발빠르게 만주 진출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8〉 1차로 일본에 귀환한 만주(당시는 동북)의 일본인 고아들. 1948년 겨울, 도쿄 시나가와(品川) 역. [사진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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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일 개척단 유골 5000구 수습, 묘지 건립하라”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7〉 항일의용군을 도왔다고 의심되는 마을을 초토화시킨 만주의 일본인 무장개척단. [사진 김명호] 일본 패망 후 헤이룽장(黑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