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서 구사일생한 천유런, 혁명세력에 투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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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호 28면

1 천유런의 목숨을 구해준 시수쩡(앞줄 왼쪽 일곱번째)은 돤치루이 내각의 실력자였다. 참모총장 시절 몽고를 방문한 시수쩡. 연도미상.

1 천유런의 목숨을 구해준 시수쩡(앞줄 왼쪽 일곱번째)은 돤치루이 내각의 실력자였다. 참모총장 시절 몽고를 방문한 시수쩡. 연도미상.

쑨원(孫文?손문)은 천유런(陳友仁?진우인)의 글을 좋아했다. 사람욕심 많은 쑨원이 눈독을 들일만했다. 측근들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어 문장이 유려하고 막힘이 없다. 총리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의 매국 외교를 비판하는 글을 읽어봐라. 국제 문제에 정통하고 화약 냄새가 물씬 풍긴다. 감옥에 있을 때도 비통함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들었다. 매사에 낙관적이고 게다가 애국자다." 한때 쑨원을 비판했다는 말을 듣고도 "간 큰 사람은 원래 그런 법"이라며 재미있어했다.

친일 돤치루이 총리 비판해 투옥 #유감 표명도 거절하고 죽을 각오 #석방 후 쑨원 찾아가 외교 대표로


1917년 봄부터, 천유런은 자신이 경영자나 다름없는 영어신문 징바오(京報)에 사론(社論)을 직접 썼다. 국가 이익을 도외시하는 정객들의 추태를 연이어 폭로했다. 돤치루이는 눈만 뜨면 신문을 집어 던졌다. "이게 선전포고지 무슨 놈에 사론이냐? 나를 향한 조준사격이나 다름없다"고 노발대발했다.

천유런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조심하라는 주변의 권고도 한 귀로 흘렸다. "편하게 살기 위해 조국을 찾지 않았다." 투옥된 후에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경찰총장과 참모총장을 겸한 시수쩡(徐樹錚?서수쟁)이 돤치루이에게 의견을 냈다. "천유런은 영국 국적이다. 경고로 그치자." 돤치루이는 고집불통이 아니었다. 최측근의 건의를 무시하지 않았다.

"아이들 혼자 키울 자신 있다" 부인 편지에 안도 

2 천유런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주도 뛰어났다. 부인이 세상을 뜨자 30세 연하인 장징장(張靜江)의 딸과 재혼했다. 1931년, 프랑스 파리.[사진=김명호 제공]

2 천유런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주도 뛰어났다. 부인이 세상을 뜨자 30세 연하인 장징장(張靜江)의 딸과 재혼했다. 1931년, 프랑스 파리.[사진=김명호 제공]

감옥 면회실에서 시수쩡은 생면부지의 천유런에게 사정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발표해 유감이라는 성명서 한장이면 된다." 천유런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이 안에 있겠다. 정식으로 재판에 회부해라." 시수쩡은 난감했다. 결심이 서자 돤치루이에게 보고했다. "처형하면 영국이 가만있을 리 없고, 풀어줘도 고마워할 사람이 아니다. 그럴 바에야 관용을 베풀자." 시수쩡은 천유런과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수소문했다.

시수쩡이 돌아간 지 몇 시간 후, 간수가 천유런의 감방 문을 열었다. 야릇한 미소 지으며 한마디 했다. "좋은 곳으로 가자." 천유런은 죽음을 직감했다. 가보니 또 면회실이었다. 절친한 친구가 묘책을 제시했다. "베이징의 정치판은 복잡하다. 몇 년간 씻지 않은 엉덩이보다 더 지저분하다. 너는 태상황(太上皇)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살아날 방법이 없다." 이어서 국적 문제를 거론했다. "너는 영국 국민이다. 돤치루이에게 압박을 가해달라고 영국 공사관에 도움을 청하겠다."

듣기를 마친 천유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사 된다 해도, 그런 방법은 쓸 수 없다.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나는 영국 국민이었다. 영국 부영사를 찾아가 중국 수도에 거주하는 영국인으로 등기했다. 2년 후 연장 수속 밟으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거절했다. 현재 내 신분은 베이징에 사는 중국 국민이다. 영국에 보호를 요구할 수 없고, 영국도 나에게 사법권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 책 읽으며 고독을 즐기겠다." 친구가 홍콩과 상하이의 일류 변호사와 의논하겠다고 하자 그것도 거절했다. "그 사람들에게 내 속을 이해시킬 방법이 없다. 변호사가 나설 문제가 아니다."

국선 변호사들이 런던에 있는 부인의 편지를 들고 왔다. 남편의 처지를 걱정하는 내용은 한 줄도 없었다. "나는 별 일 없고, 애들도 잘 자란다. 집안에 웃음이 그칠 날이 없다. 혼자 양육할 자신이 있다." 천유런은 마음이 놓였다.

일본과 경쟁하던 미국이 막후서 석방 압력 

중국의 영자신문들이 천유런의 구금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모른체하는 영국 공사관을 이구동성으로 비난했다. 일이 이쯤 되자 주판알만 튀기던 미국 공사관이 영국 공사에게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영국과 프랑스는 기력을 소진했다. 같은 동맹국이었지만 전쟁터에서 떨어져있던 미국과 일본은 멀쩡했다. 영·프 양국이 누리던 국제적 지위를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미국과 일본의 경쟁은 필연적이었다. 친일 정객인 돤치루이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영국 외교부가 베이징주재 공사에게 지시했다. "천유런의 석방을 위해 전력을 다해라. 국적이나 논조 따위는 거론할 필요 없다.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라는 말만 강조해라."

베이징의 정세는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 와중에 돤치루이가 실각했다. 얼떨결에 감옥 문을 나선 천유런은 베이징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예상은 했지만,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느냐. 서태후인지 뭔지, 맹꽁이 같은 아녀자가 휘저어 놓은 여파가 너무 가혹하다. 모든게 서구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 때문이다. 한차례 뒤집어 엎지 않으면 중국은 희망이 없다." 남쪽의 혁명 세력에 투신하기로 작정했다.

쑨원은 제 발로 찾아온 천유런을 베르사이유 회담 남방 측 대표로 파견했다. 한 미국 역사가의 글을 소개한다. "천유런은 국제법의 대가였다. 1919년 베르사이유에서 조계(租界) 회수를 천명하며, 중국인 관할 하에 외국인이 참여하는 조계 운영을 주장했다. 내용이 어찌나 명쾌하고 선명했던지, 서구 열강은 외국인이 누리던 치외법권 취소의 전 단계인줄 알면서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중국 외교에 천유런 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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