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자율규제’란 이름의 금융 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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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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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지표요? 그럼 달라질 게 없는데요. 당국이 얼마라는 기준선을 정해줄 테니 그걸 기다려 봐야죠.”

지난 9월 초 금융위원회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연내에 도입하되 대출심사에 참고지표로만 쓴다고 밝혔을 때 은행 담당자들의 반응은 이랬다. 60%를 넘으면 대출이 거절되는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처럼 DSR도 정부가 일정 선을 제시하는 게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시장의 관심은 DSR의 기준선이 70%냐, 80%냐에 쏠렸다.

그런데 11월 24일 금융위가 발표한 가계부채 후속대책 자료 어디에도 이러한 수치가 나오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정말로 참고지표로만 활용하겠다는 방침이었다. 다만 괄호 안에 작은 글씨로 적힌 이 문장이 눈에 띄었다. ‘(활용도·가계부채 증가속도 등을 감안, 필요 시 자율규제로 운영)’

또 자율이다. 금융권엔 ‘자율규제’라는 딱지가 붙은 규제가 한 둘이 아니다. 애초 정의는 금융협회가 회원사 합의로 운영하는 자체 규제인데 실상은 정부 규제와 다를 바 없다. 오죽하면 금융위가 지난 6월 7개 금융협회의 329개 자율규제가 과도하다며 정비하겠다고 나섰을 정도다. 그때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금융당국은 필요할 때마다 협회 자율규제를 활용하는 등 우회적으로 규제를 하고 있다.”

하지만 DSR 도입 계획을 살펴보니 임 위원장의 말은 빈말이 될 것 같다. 금융당국 자율규제라는 명목의 우회 규제를 하나 더 보탤 듯하니 말이다.

자율은 금융개혁을 내세우는 금융당국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지난해 가격 자율화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보험사 예정이율이나 은행 수수료 결정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획기적인 변화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보험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금융감독원이 표준이율을 내려고 보니 저금리라 대폭 낮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보험료가 크게 뛸 거고 그 책임이 금융당국에 향할 게 아닙니까. 그래서 나온 게 가격 자율화입니다.” 가격 상승에 대한 책임을 면하면서 업계에 생색도 낼 수 있는 일석이조의 정책이었던 셈이다.

금융권에서의 자율이란 말의 용법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고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이 떠오른다.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금융당국 앞에서 금융사는 순한 모범생이기만 하다. 금융당국의 면피용 자율 카드가 계속 통하는 이유다. 금융회사가 진정 자율적으로 리스크를 관리하는 능력을 갖출 날은 올지, 그때는 금융당국이 손을 뗀 진짜 자율의 시대가 열릴지 궁금하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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