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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괴물과 싸운다고 괴물 닮아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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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백민경
백민경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백민경 사회1부 기자

백민경
사회1부 기자

교육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중학교 역사 1·2,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읽어 본 결론이다. 교과서엔 토론과 발표 탐구 주제가 부실하게 돼 있었다. 학생의 능동적 참여를 강조하는 2015 교육 과정의 취지가 교과서에 반영돼 있지 않은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功)은 5쪽가량 서술하고 과(過)는 한 단락에 그치는 등 서술의 균형도 잃었다. 일반인의 눈에도 중대한 오류가 많이 보였다. 고조선의 문화세력 범위, 청동기 시대 유물인 비파형 동검의 분포도가 중학교 교과서와 고교 교과서에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고 설명도 일치하지 않았다. 같은 문장이 한 쪽에 두 번 나오기도 했다. 교과서 분석에 참여했던 모 수석 교사는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 논쟁은차치하고라도 도저히 수업을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국정교과서는 그렇다 치자. 서울시교육청은 지난달 30일 ‘서울 모든 중학교, 내년에 국정 역사교과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교과서가 공개된 지 사흘 만에 이런 결정이 내려진 과정을 알아봤다. 28일 오전 조희연 교육감의 지시로 9월 국정교과서 구입 신청을 한 19개 중학교 교장을 교육청으로 소집했고 이들을 설득해 교과서 구입을 취소하게 했다. 해당 자료를 낸 민주시민교육과 관계자는 “과거 우편향으로 분류됐던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처럼 이들 학교가 역풍을 맞을까 ‘보호하는 차원’에서 한 일이다. ‘강압’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2014년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 앞에서는 이에 항의하는 전교조와 진보단체가 마이크를 들고 소리를 높이고 꽹과리를 울리기도 했다.

관계자의 말대로 교육감이 교장들을 불러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입장을 바꿔 보자. 일반적으로 학교 교육 과정은 학교 교육과정위원회의 협의를 바탕으로 각 학교가 정한다. 한 공립중 교장은 “우리 학교는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했는데 교육청에서 384개 중학교 모두가 국정화에 반대하는 것처럼 자료를 내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최근 국정화 반대 성명을 낸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김동석 대변인 역시 “인사권과 재정권을 가진 교육감이 소집을 하는 것 자체가 교장에게 압박이 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비판받았던 점은 의견수렴 절차 부족, 밀실집필이었다. 역사에 대한 다른 관점이나 해석이 자리 잡을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또 다른 독선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우려스럽다. 판단은 학교가 알아서 하면 된다. 교육감들이 정부의 하향식 일방 소통을 줄곧 비난하면서 그 행동을 따라 하려는 건가. 학교 앞 ‘꽹과리’도, 학교장 ‘소집’도 안 된다.

백 민 경
사회1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