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당선에 놀란 유럽, 긴급 회동 나서

중앙일보

입력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에 놀란 유럽연합(EU) 외무장관들이 긴급 회동했다. 독일과 EU가 주도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영국·프랑스·헝가리는 빠졌다. 지나치게 과민 반응이란 이유에서다. "EU의 균열을 보여주는 것"(파이낸셜타임스)이란 해석이 나왔다.

EU 외무장관들은 14~15일 회동이 예정돼 있었다. EU 외교정책이사회였다. 그러나 하루 앞선 13일 긴급 회동을 했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 고위대표가 초청하는 형식이었다. 실제론 독일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외무장관의 제안이었다. 그는 트럼프 당선 직후 "많은 나라가 트럼프 정부의 외교 독트린이나 그의 발언에서 명백하고 일관된 입장을 파악하려 하고 있지만 성공적이지 않다"며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도 여러 차례 트럼프 당선자의 외교정책이 어떻게 될지 의견을 나눴으나 그조차도 통찰력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슈타인마이어가 회동을 제안할 때 트럼프 당선인에게 EU가 바라는 바에 대해 분명한 메시지를 보낼 기회란 판단을 했을 것이라고 현지 언론은 분석했다.

사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트럼프와 EU과의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멀어 보이는 상황이다. 우선 안보 문제다. 트럼프는 유럽 국가들이 안보비용을 부담하지 않을 경우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언급했다.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비용의 70%가량을 부담한다. 또 나토 국가들이 공격을 받더라도 자동 방어에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고도 했다. 옛 소련의 일부였다가 독립해 NATO 회원국이 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해 3국의 불안이 커질 수 밖에 없다.

트럼프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골치거리다. 관계 개선에라도 나선다면 대러 제재 중인 유럽으로선 난감해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트럼프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부정적 입장 탓에 EU와 미국이 협상을 벌여온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의 존속 여부도 애매해졌다. 트럼프 당선인이 지구 온난화 주장을 불신한다는 점에서 기후변화 협약의 지속 여부도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미국이 약속한 갹출금을 줄이기만 해도 타격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EU에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경고 사인"(도날드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란 말까지 나왔다.

EU 차원에선 우려감이 팽배한 게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긴급 회동까지 할 사안인가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도 있다. 트럼프의 국무장관 내정자도 정해지지 않은 시점이어서다. 유럽의 대표적 국가인 영국·프랑스가 그런 이유로 불참했다.

영국의 보리스 존슨 외무장관은 "임박해 통보여서 일정 조정을 못했다"며 긴급 회동에 불참했다. 그러나 그는 "트럼프 당선을 두고 부정적 발언을 내놓는 건 집단적인 징징거림"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프랑스의 장 마르크 에로 프랑스 외무장관은 안토니우 구테흐스 차기 유엔 사무총장과의 선약을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나 그 역시 "사람들이 왜 동요하는지 모르겠다.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NATO 문제를 두곤 "(트럼프 당선인이 돈을 더 내라고 했으니 그렇게 될 게다. 하지만 미국이 NATO 동맹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헝가리 페테르 시야르토 외무장관은 "완전히 때이른 회동"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영·불의 비토로 긴급 회동은 어정쩡하게 끝났다. 참석자들은 "미국 유권자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차기 al 행정부의 유럽 정책을 조속히 파악하기 위해 트럼프의 정권인수팀과 접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디디에 레인더스 벨기에 외무장관은 "우리는 향후 몇 달간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언론에선 존슨의 불참을 두고 슈타인마이어와 더 멀어지게 됐다고 전했다. 슈타인마이어는 "존슨 장관과 같은 방에 있는 것조차 참을 수 없어할 정도"라 말한 바 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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