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진 아들 또래 눈망울 보면 주저앉을 수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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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건강과 가족들의 재산,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의 목숨까지…. 가습기 살균제는 피해자들의 삶을 짓밟았다. 하지만 그들은 주저앉지 않았다. 본지 취재팀이 인터뷰한 109명의 피해자들은 매일 일상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아픔을 삭히며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막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절망 딛고 싸우는 피해자들
김덕종씨, 영국 옥시 본사 가서 항의
‘인공 폐’ 이정화씨도 시위·소송 앞장

주부 이정화(39)씨는 첫 아이를 임신한 2009년 가습기 살균제를 처음 사용했다. 아이에게 좀 더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2011년 2월 둘째 딸을 임신했을 때도 살균제를 썼다. 하지만 임신 한 달 만에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누군가 목을 조르듯 숨이 막히고 온몸이 아픈 증상이 시작됐다. 호흡곤란으로 수차례 의식을 잃기도 했다. 결국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태아가 위험하다”는 의사의 말에 임신 31주 만에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 이씨는 양쪽 폐가 주저앉고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에서 인공 폐를 이식받았다.

폐 이식 수술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면역억제제를 평생 복용해야 하고 작은 기침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일상이 시작됐다. 하지만 용기를 냈다. 같은 처지의 피해자들을 수소문해 1인 시위를 하고 옥시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옥시 측 변호를 맡은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질병원인이 미세먼지, 황사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검찰에 제출했다는 소식을 접하곤 피해자들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는 “여기서 쓰러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고 서로 손을 꽉 잡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금도 아이들과 사람이 많은 놀이공원 같은 장소엔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피해자 모임과 각종 집회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이제는 원망만 하진 않고 남은 사람, 떠난 사람 모두를 위해 싸워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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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돌에 세상을 떠난 딸 서인이를 위해 옥시 본사 앞에서 지난달 22일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최지연(36)씨. [신인섭 기자],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지연(36)씨 역시 아픔 속에서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 분투 중이다. 최씨의 딸 서인이의 별명은 ‘장군’이었다. 또래보다 몸이 크고 튼튼했던 아이였다. 그런 서인이가 6개월 되던 2007년 11월 감기에 걸렸다. 의사는 습도조절이 중요하다며 가습기 사용을 권했다. 최씨는 이때부터 가습기 살균제를 지속적으로 썼다. 이후 서인이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서인이는 첫돌을 맞이한 2008년 5월 24일 숨졌다.

당시 둘째를 임신 중이었던 최씨는 정신적 충격으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다. 하지만 가족들이 그런 최씨를 일으켜 세웠다. 유치원 교사였던 최씨는 2010년 초 인천에 어린이집을 열었다. 최씨는 “서인이를 위해서라도 소중한 아이들을 안전하게 돌보는 데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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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네 살 아들을 잃고 지난달 11일 서울 여의도 옥시 본사를 항의 방문한 소방관 김덕종(40·)씨. [신인섭 기자], [환경보건시민센터]

경북 구미에서 소방관으로 재직 중인 김덕종(40)씨는 2008년 아들 승준이를 하늘로 떠나보냈다. 열악한 근무여건 속에서 화마(火魔)와 싸우던 김씨는 정작 아이의 죽음 앞에선 무력했다.

2011년 아무런 생각 없이 사용했던 가습기 살균제가 사망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씨는 그날부터 수십 곳의 집회, 시위 현장을 찾아다니며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알리는 데 힘썼다. 지난달엔 피해자들과 영국 옥시 본사를 찾아가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평생을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불꽃, 새까만 연기와 싸워왔어요. 그런데 아무 냄새도 없는 수증기가 승준이를 데려갔습니다. 저는 평생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남은 내 아이들, 화재 현장이나 사고 현장에서 마주치는 승준이 또래의 맑은 눈망울을 보면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어요.”

김씨와 같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힘을 모으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피해자들과 함께 20일 ‘가습기 살균제 참사 전국 네트워크(가칭)’를 공식 출범할 예정이다. 피해자 구제와 대책 마련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화학물질 관리체계 개선을 위한 서명 운동을 진행한다.

◆특별취재팀=채윤경·손국희·정진우·윤정민·송승환 기자 pch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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