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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눈 폭탄과‘매력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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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일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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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일 사회부문 기자

“2년 넘게 취업 공부해 취직했어요. 꿈에도 그리던 첫 출근만 할 수 있다면 밤을 꼬박 새워도 괜찮아요.”

 25일 0시10분 제주국제공항에서 만난 20대 후반의 A씨는 탑승구 쪽을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한파와 폭설로 인해 지난 23일부터 하늘길이 막히는 바람에 입사 첫날 결근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는 첫 출근을 앞두고 21일 가족들과 함께 2박3일간 제주여행을 왔다가 발이 묶였다.

 비상상황이 계속되던 24일 밤. 제주공항 대합실에는 1700여 명의 승객이 모포 한 장에 의지한 채 쪽잠을 청했다. 일부 승객은 대기석 의자에 카트를 갖다 붙여놓고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기표를 얻기 위해 꼬박 이틀 동안을 공항에서 지낸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공항 한편에선 웃음소리도 들렸다. 뜻하지 않은 ‘공항 노숙’이 길어지면서 짜증을 낼 법도 한데 오히려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려는 이들이었다. 관광객 김현우(21·김해시)씨는 “할아버지부터 사촌동생까지 가족 19명이 단체로 노숙하는 것은 돈을 주고도 하지 못할 경험”이라며 웃었다. 김씨는 외가 친척 19명과 제주여행을 왔다가 비행기가 끊겨 공항에서 쪽잠을 잤다. 차가운 대기실 바닥에 누워 있던 가족들은 “일가족 19명 단체 노숙”을 외치는 김씨의 말이 끝날 때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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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와 폭설로 고립된 제주국제공항 대합실에서 24일 밤 승객들이 쪽잠을 자고 있다. [제주=뉴시스]

 같은 시간 공항 청사 밖에선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이 목격됐다. 비행기를 기다리다 지친 아버지 박창희(40·부산시)씨가 아들 주원(9)군의 손을 잡고 함께 눈덩이를 굴렸다. 박씨는 “공항 노숙에 지친 아내가 잠깐 잠든 사이 눈사람을 만들어 아들에게 큰 점수를 땄다”고 말했다.

 뜻밖의 천재지변에 나눔의 정신을 실천한 시민들도 있었다. 제주도 지역 최대 커뮤니티인 제주맘카페(cafe.daum.net/jejumam)는 24일 “관광객들에게 무료 숙박을 제공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카페 회원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와 전화번호를 올려 무료 숙박을 제공했다. 공항에 대기 중인 승객들을 위해 모포·이불·김밥·캔커피를 제공하는 도움의 손길도 있었다.

 32년 만의 폭설로 위기에 빠진 제주를 200여 년 만에 부활한 ‘김만덕 정신’이 구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제주대 황경수(행정학과) 교수는 “고립된 관광객들을 도우려고 나선 제주도민들의 손길에서 조선 정조 때 흉년이 들자 전 재산을 털어 백성을 살린 제주 거상 김만덕(1739~1812)의 나눔 정신이 느껴졌다”며 “폭설로 인해 불편과 불만이 큰 상황에서도 침착한 모습을 보인 관광객들에게서 성숙한 시민의식을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제주공항에서>
최충일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