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메르스 잊었나 … 내년 역학조사관 보강예산이 ‘0’이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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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핵심 대책의 하나인 역학조사관 보강 사업에 내년 예산이 한 푼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동안 ‘방역 강화’를 외쳐온 정부의 신뢰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처사다. 전염병 대응체계 구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력 충원부터 이렇게 삐걱거린다면 정부의 방역강화 의지까지 의심받지 않을 수 없다. 메르스 사태 당시 ‘초기 대응 실패’라는 비난에 직면했던 정부가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당시의 심각성을 망각한 듯한 느낌이다.

 전염병 감염 경로를 조사하고 환자와 접촉자를 파악해 추가 확산을 막는 역학조사관의 충원은 방역 강화의 핵심 사안이다. 현재 질병관리본부에는 2명의 정규직 외에 40명의 비정규직만 근무해 절대인력이 부족할 뿐 아니라 업무 연속성도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를 해결하려고 국회는 지난 7월 역학조사관을 정규직 공무원으로 확충하는 내용의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정부도 지난달 역학조사 인력 확대안이 포함된 ‘국가방역체계 개편 방안’을 내놨다. 그런데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가 인력 확충안을 제출했음에도 행정자치부는 “협의가 더 필요하다”며 결정을 미뤄 결국 내년 예산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정책 방향이 정해졌고 관련 법률도 입법된 마당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더구나 역학조사관 확충은 정부가 여러 차례 국민에게 약속했던 사안이지 않은가. 황교안 국무총리도 지난 6월 24일 대정부 질문에서 “역학조사관 정규직이 2명에 불과해 비상사태 시 즉각 동원하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주무장관인 정진엽 복지부 장관도 지난 9월 1일 “방역체계의 근간인 우수한 역학조사관을 확보해 안심 방역의 기틀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행자부 측은 내년 예비비로 역학조사관을 선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방역 강화라는 엄중한 대국민 약속을 예비비로 추진하겠다는 발상부터 비합리적이다. 행자부로서는 공무원 증원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겠지만 역학조사관 강화는 증원의 필요성과 시급성이 충족되는 사안이다. 국회예산정책처도 내년도 예산안 분석 보고서에서 “감염병 확산 대응체계 구축을 위해 이른 시일 내에 역학조사관을 충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지 않은가.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에서 유입된 전염병에 노출될 수 있는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시기에 정부가 전염병 대응능력을 신속하게 갖추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정부는 이른 시일 안에 다시 조정해 역학 인력 확충을 내년 예산안에 반드시 반영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방역강화 의지를 확인시키고 국민의 우려를 불식해야 마땅하다. 당국이 이런 행정 절차 하나에도 우왕좌왕하니 대형 전염병에 대한 국민적 공포가 과도하게 증폭되는 것이다. 메르스 공포에 떨었던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린다면 한시바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