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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운다고 집으로 데려가라 해 … 사설 유치원 보내자니 감당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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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른다섯에 결혼해 2년 전 첫딸을 낳은 윤성은(38)씨가 출근하는 자신에게 달라붙는 아이를 보모에게 맡기려고 어르고 있다. 윤씨는 “경제적부담이 크지만 아이가 자기 의사 표현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보모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며 “둘째는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세 살 된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는 이건희(31)씨는 얼마 전 직장에서 일하다가 어린이집 교사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집으로 데려가라”는 통보였다. 서둘러 어린이집으로 달려가 보니 아이는 혼자 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이씨가 “왜 우리 아이를 돌봐 주지 않느냐”고 따지자 원장은 “돌봐야 할 아이가 많아 교사가 한 아이에게만 붙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세 살배기 딸을 둔 직장맘 강민희(34)씨는 “유제품 알레르기가 있는 딸을 어린이집에 맡기려고 했더니 가는 곳마다 음식을 따로 챙겨 주기 어렵다며 받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씨는 “보육비를 더 내더라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시설이 절실하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의 보육 시스템은 무상보육이란 도그마에 갇혀 질적 향상보단 양적 확대에만 초점을 맞춰 왔다. 정부의 보육시설 기준 완화정책에 따라 전체 어린이집 수는 2000년 1만9276곳에서 지난해 말 4만3742곳으로 2.3배가 됐다.

주로 민간어린이집이 늘었고 국공립은 같은 기간 1295개에서 2489개로 1194개 증가하는 데 그쳤다. 시설 공급이 늘어나자 어린이집이 수용하고 있는 아동 수도 같은 기간 68만여 명에서 150여만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갑자기 공급을 늘리려니 자격 미달 원장이나 보육교사의 유입을 차단할 장치도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연초 폭행사건이 일어난 인천 송도 어린이집을 비롯해 민간어린이집에서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린이집 87%가 가정·민간 시설이다.

 보육시설을 믿지 못해 보육도우미를 쓰고 싶어도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비용도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일곱 살 딸을 돌보기 위해 입주 보모를 쓰고 있는 금융회사 차장 김모(38)씨는 “월급 190만원 외에 수시로 보너스까지 챙겨 주고 아이 유치원비 90만원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말했다. 은행원 남편 연봉까지 합하면 세후소득이 1억원을 훌쩍 넘어가지만 육아 부담 때문에 저축을 할 엄두도 못 낸다. 여성가족부가 도우미를 관리해 주는 ‘아이돌보미’사업이 엄마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도의 수혜를 보는 건 5만4000가구에 불과했고, 그나마 종일제는 4373가구에 그쳤다.

 유치원 입학연령이 돼도 ‘고행’이 끝나는 건 아니다. 유치원 역시 믿고 맡길 곳이 적다 보니 영어학원 등을 빙자한 사설유치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 외벌이를 하는 회사원 최모(41)씨는 “다른 아이들이 다 학원에 다니니 아이에게 이것저것 사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다”며 “강남에선 유치원생부터 월 100만원이 드는 경우가 적지 않고 중·고교로 올라가면 개인 과외와 학원 수업이 늘어나면서 감당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교육비 부담을 생각하면 하나만 낳아 집중적으로 뒷바라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러다 보니 아예 자녀 없이 살기로 한 기혼자도 늘고 있다. 중견기업 직원 김모(32)씨는 1년 전 결혼할 때 남편에게 “부담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아이를 낳지 않기로 약속했다.

 학교가 부모를 부르는 관행도 학부모에겐 부담이다. 초등학교 3학년생 아들을 키우는 권모(40)씨는 “녹색어머니, 급식재료 검수 어머니 같은 제도를 보면 학교 행정의 일정 부분이 엄마의 몫으로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올해 초등학생 학부모가 된 유미리(38)씨 역시 “유치원 땐 재롱잔치만 가면 됐는데 학교에 가니 참석해야 할 행사가 적지 않다”며 “보육과 교육비 부담을 해소하지 못하고선 둘째 낳을 엄두가 안 난다. 산 너머 산이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동호 선임기자, 박현영·정선언·김민상·김기환 기자 d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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