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하면 군인 목을 쳐 군기 잡은 위안스카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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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호 29면

짜이펑의 친형 광서제는 네 살 때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 다음해인 1876년 자금성에서 황제로선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 김명호]

1898년 무술(戊戌)년, 개혁(變法)을 추진하던 광서제(光緖帝)의 꿈은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의 배신으로 96일 만에 물거품이 됐다. 3년 후, 서태후는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 짜이펑(載沣·재풍)을 독일에 사죄사로 파견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27>

11월 7일, 직례총독(直隷總督)과 북양대신(北洋大臣)을 겸하던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이 베이징의 허름한 사찰에서 세상을 떠났다. 북양신군의 설립자 위안스카이가 리훙장의 직을 계승했다. 광서제의 개혁을 좌절시킨 지 3년 만이었다.

독일에 있던 짜이펑은 빌헬름 2세로부터 리훙장의 사망과 위안스카이의 근황을 들었다. 짜이펑이 듣는 둥 마는 둥하자 빌헬름 2세가 충고했다. “네가 군기대신이라니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신하들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군대를 장악해야 한다. 10년 전에 비스마르크를 내쫓았다. 군대가 나를 추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 청나라는 황권이 약하다. 힘없는 것들이 평화주의자 행세를 한다. 귀국하면 군 지휘관을 황족 출신으로 교체해라. 황실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제야 짜이펑은 진땀을 흘렸다. 18세, 소년도 청년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였지만 어릴 때부터 본 게 많다 보니 긴장할 만도 했다. 독일 황제의 말대로라면 위안스카이의 천하는 시간문제였다.

귀국한 짜이펑은 서태후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개혁의 개 자도 꺼내지 못했다. “책이 제일이다. 아무 일도 없으면 신선이나 다를 바 없다”는 글귀를 벽에 걸어놓고 책에 묻혀 살았다. 해만 지면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어둠이 걷히면 태양을 야속해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위안스카이와는 딴판이었다.

역사의 주인공들은 특징이 있다. 꼼꼼함이라는 기본기 외에 바르고(正), 사악하고(邪), 밝고(明), 어두운(暗) 면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머리구조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몇 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위안스카이도 그랬다. 생전, 사후를 막론하고 “음모가, 나라를 도둑질한 도둑놈, 위대한 개혁가,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 공화주의자, 황제를 꿈꾼 몽상가”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저주와 찬양을 동시에 들었다. 짜이펑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청나라의 외교권과 북방의 군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개혁을 시작했다. 군대부터 틀어잡았다. 위안스카이가 신군 훈련을 시작하기 전까지 청나라 군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중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의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군인들의 행진 대열은 가관이다. 엄숙하고 근엄한 표정들은 정말 볼만하다. 어깨에 길다란 총들을 멨지만 자세가 제각각이다. 실탄도 없는 것 같았다. 한 손에 부채를 든 이유는 이해할 방법이 없다.”

위안스카이는 신군들에게 참율18조(斬律十八條)를 반포했다. “진지에서 고개를 뒤로 돌리는 사람, 전쟁터에서 갑자기 아프다고 호들갑 떠는 사람, 한밤중 행군에서 낙오하는 사람, 고향 타령해대며 패거리 짓는 사람”은 무조건 목을 쳤다. 순식간에 군기가 잡혔다. 런던타임스에 “위안스카이는 이 시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군사개혁가다.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 군대의 결점을 짧은 시간 동안에 뜯어고쳤다. 위안스카이의 군대가 주둔한 덕에 이름 없는 작은 마을들의 명칭이 구미 각국의 지도에 표기되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노(老)제국의 외교권과 북방의 군대를 움켜쥔 위안스카이의 개혁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조건 숨겨 두기만 하던 중국인들의 금전관을 바꾸기 위해 은행 건립을 추진했다. 중국 최초의 국립은행이 문을 열었다. 전당포 주인들의 불평도 간단히 처리했다. 몇 사람 목이 떨어져 나가자 끽 소리도 안 했다. 동시에 교육기관 설립도 서둘렀다. 광서제의 개혁 실패로 문을 닫았던 톈진대학당(天津大學堂)이 베이양대학당(北洋大學堂)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천 년간 내려오던 과거제도는 폐지시켰다. 호구조사도 실시했다. 2년이 걸렸다.

거리에 가로등을 세우고 전차도 개통시켰다. 밤거리가 밝아지고 전차가 거리를 질주하다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폐단이 발생했다. 전국의 유명한 도둑들이 “밤이 대낮처럼 환해서 일하기에 편하고, 낮에는 도망치기 편하다”며 톈진으로 몰려들었다. 위안스카이는 도둑만 전문으로 잡는 군대를 따로 만들었다. 경찰의 탄생이었다.

1908년 1월, 뉴욕타임스에 위안스카이의 사진이 크게 실렸다. “매일 새벽 5시에 업무를 시작해 밤 9시가 돼야 휴식에 들어가는 사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 일세를 풍미하던 경륜가들도 그 앞에만 오면 고개를 숙인다.”

그해 겨울, 짜이펑의 아들 푸이가 황제에 즉위하고 짜이펑은 섭정왕이 됐다. 위안스카이는 죽은 광서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포가 엄습했다. 이럴 때는 36계가 상책이었다.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조선땅에서 제일 먼저 도망치는 바람에 목숨도 건지고 출세의 발판을 만든 적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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