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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돈 먹은 만주귀족, 짜이펑 결단에 반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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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호 29면

섭정왕 짜이펑에겐 아들이 두 명 있었다. 오른쪽이 장남인 마지막 황제 아이신제뤄 푸이(愛新覺羅 溥儀). 왼쪽은 차남 푸제(溥傑). [사진 김명호]

서태후는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의 보호막이었다. 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황제나 다름없는 짜이펑과 황족들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매일 아침 궁궐 문턱을 밟을 때마다 혈혈단신, 지옥문을 들어서는 것 같았다. 훗날 친구 쉬스창(徐世昌·서세창, 위안스카이 사후 4년간 총통 역임)에게 당시의 심정을 말한 적이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붙잡고 미사여구를 늘어놨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해대는 입바른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당장 베이징을 떠나고 싶었지만 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했다. 워낙 의심 많은 종자들이라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몰랐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28>

위안스카이를 처형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어사(御史) 장춘린(江春霖·강춘림)이 위안스카이 제거를 주장했다. “골육을 모함하고, 사사롭게 패거리를 만들어 조정을 농락했다. 빨리 퇴출시키지 않으면 무슨 변을 일으킬지 예측하기 힘들다.” 골육을 모함했다는 말은 캉유웨이(康有爲·강유위)와 함께 개혁을 추진하다 위안스카이의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짜이펑의 형 광서제의 비극을 의미했다.

해외 망명 중이던 캉유웨이도 가만있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위안스카이가 광서제를 독살했다’고 목청을 높였다. 짜이펑에게 상소 형식의 서한을 보냈다. “선제(先帝)의 상(喪)은 뭔가 석연치 않다. 위안스카이는 예전에도 역적이었고 지금도 역적이다.” 1898년, 무술(戊戌)년에 이화원을 포위해 서태후를 살해하려 했다는 것도 모함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흉악한 모의를 한 적이 없다. 위안스카이가 선제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지어낸 말이다. 하루빨리 죽여 없애야 한다.”

궁궐 안에 “위안스카이 처형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급기야 “궁궐 안에서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엉뚱한 상황이 벌어졌다. 위안스카이 집 앞에 친구와 부하들이 확인을 하겠다며 몰려들었다. 톈진의 북양신군 주둔지에도 자동차와 마차들이 쉴 새 없이 군문으로 빨려들어갔다. 전운이 감돌았다.

10여 년간 위안스카이는 돈과 칼로 사람들을 관리했다. 정적들에겐 가혹했지만 만주귀족들에겐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도 돈을 싸들고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줘서 싫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한쪽이 겁이 나면 다른 한쪽도 겁이 나기 마련, 안절부절못하기는 짜이펑도 마찬가지였다. 베이징을 둘러싼 신건육군(新建陸軍)은 모두 6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중 5곳이 위안스카이의 부대였다. 동북3성과 직례(直隷·지금의 하북성), 산둥(山東)의 총독이나 순무(巡撫)도 위안스카이의 심복들이었다.

짜이펑이 주저하자 위안스카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황족 한 사람이 짜이펑에게 경고했다. “위안스카이가 두려워한 사람은 서태후가 유일했다. 이제 위안스카이의 안중에는 아무도 없다. 세력이 더 커지면 제거하려야 할 방법이 없다.” 어사들도 짜이펑을 압박했다. “위안스카이가 섭정왕을 내쫓고 융유태후를 옹립해 수렴청정을 실시하려 한다.” 짜이펑은 그제야 위안스카이 제거를 결심했다. 융유태후는 형 광서제의 부인이었다. 권력에는 형수고 뭐고 없었다.

짜이펑은 모순덩어리였다. 위안스카이를 죽여버리자는 의견에 동조했지만 “일국의 대신을 죽이려면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며 명분을 찾는 데 골머리를 싸맸다. 무술년의 밀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죄가 되지 않았다. 위안스카이의 돈을 받아먹은 사람 거의가 만주귀족이다 보니 부패로 옭아넣을 수도 없었다.

매사에 우유부단하던 사람이 결단을 내리면 희극을 연출하기 십상이다. 짜이펑은 군기대신(軍機大臣)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군기대신은 경친왕(慶親王), 장즈퉁(張之洞·장지동), 루촨린(鹿傳霖·녹전림) 외에 짜이펑과 위안스카이, 모두 5명이었다. 위안스카이는 당사자이다 보니 참석 자격이 없었다.

경친왕은 황족 중에서 위안스카이의 뇌물을 가장 많이 받아먹은 장본인이었다. 평소 장즈퉁은 위안스카이를 “학문이 없고 술수만 뛰어나다”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사사건건 충돌도 잦았다. 짜이펑은 장즈퉁과 루촨린이 자신을 지지하리라고 의심치 않았다.

회의가 열리자 경친왕은 대성통곡했다. 당황한 짜이펑은 장즈퉁에게 눈길을 줬다. 위안스카이의 처형을 반대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군주가 어리고, 국가는 위기에 처했다. 정국도 불안하다. 대신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우리 손으로 만리장성을 허무는 것과 같다. 황제와 태후의 시신이 아직 식지 않았다.” 황제나 태후가 세상을 떠나면 100일 동안은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장즈퉁의 발언이 끝나자 경친왕이 통곡을 그쳤다. 이를 악물고 쏘는 듯이 내뱉었다. “위안스카이의 처형을 허락할 수 없다. 신건육군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할 거냐.”

회의 당일 아침,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을 떠날 채비를 했다. 허름한 복장에 싸구려 모자를 눌러쓰고 둘째 부인과 함께 집을 나섰다. 톈진(天津)행 3등 열차에 몸을 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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