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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는 '깃털'이었다…싱 대사 도발을 읽는 '역사속 단서' [채인택의 세계 속 중국]
이홍장(왼쪽)과 위안스카이(오른쪽) 주한 중국대사 싱하이밍(邢海明)의 발언 때문에 구한말 청의 군인으로 한성(서울)에 주재하며 내정 간섭을 일삼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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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위안스카이 협박, 조선 근대화의 황금 기회 봉쇄하라…한국 외교의 반면교사
━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청나라 젊은 관리의 총독 행세, 조선을 농락하다 위안스카이가 한국에 남긴 두 개의 글씨와 당시 모습 중 중화민국 대총통 취임 때 쓴 ‘愴懷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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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작가 양셴이 별세, 중화권 ‘중국 통째로 번역’ 추모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8〉 양셴이(뒷줄 오른쪽 다섯째)의 집에는 늘 문화인들이 붐볐다. 뒷줄 왼쪽 첫째가 혁명만화가 딩충(丁聰). 둘째는 명 극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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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대원군 납치 3년’ 시진핑 외교에 어른거린다
━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19세기 말 중국의 한반도 무력 개입 중화(中華)는 우월감이다. 그 의식에 인접국에 대한 간섭이 있다. 중국 외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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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관학교 교장 된 장바이리 “임기응변 능력 키워라”
━ 중앙SUNDAY 지령 503호 장바이리 덕에 첸쉐썬(앞줄 왼쪽 첫번째)은 어릴때 부터 좋은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다. 대학시절에는 밴드부 활동을 열심히했다. 1929년 가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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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관학교 교장 된 장바이리 “임기응변 능력 키워라”
1 장바이리 덕에 첸쉐썬(앞줄 왼쪽 첫번째)은 어릴때 부터 좋은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다. 대학시절에는 밴드부 활동을 열심히했다. 1929년 가을 상하이 자오퉁(交通)대학 시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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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⑤
일제 식민통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헌병 경찰제도였다. 일제는 대한제국 강점 직전 경찰권부터 빼앗았다.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강제 병합 두 달 전 총리대신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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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 점원’ 옌 신허우, 중국 최대 은행 1인자 되다
옌유윈과 양광성의 결혼식. 신부 들러리의 오른쪽 뒤 남자가 옌쯔쥔. 신랑 양광성의 뒤는 중국 최초의 IOC 위원인 국무총리 왕정팅(王正廷). 1929년 9월 8일 상하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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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1] '전당포 점원' 옌신허우, 중국 최대 은행 1인자 되다
옌요우윈과 양광셩의 결혼식. 신부 들러리의 오른쪽 뒤 남자가 엔즈쥔. 신랑 양광셩의 뒤는 중국 최초의 IOC 위원인 국무총리 왕정팅(王正廷). 1929년 9월 8일 상하이.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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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와 맞서다 총리직 내던진 탕샤오이
우정대신 시절의 탕샤오이(오른쪽)와 조선 출신의 조씨 부인. 1906년 베이징. [사진 김명호] 1937년 7월 17일, 중국의 최고 통치자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침략자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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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감옥을 털었다는 이유로 총살되기 직전의 항일 의용군들.1937년 12월 치치하얼 [사진=김명호]1937년 7월 17일, 중국의 최고 통치자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침략자 일본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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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일제 식민통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헌병 경찰제도였다. 일제는 대한제국 강점 직전 경찰권부터 빼앗았다.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강제 병합 두 달 전 총리대신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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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강성현] ‘천하제일’의 탐관, 화신(和?) 그리고 ‘빨대’와 ‘갈퀴’들의 운명
오래 전, 동료에게 들은 얘기다. ‘금 빨대ㆍ금 갈퀴’란 인물은 성이 금 씨인데, 부하의 금품을 ‘갈취’하기로 유명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승진이나 보직을 미끼로 시도 때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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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페스트 대재앙 … 만주지역 4만 명 떼죽음
1911년 1월 청나라 정부는 방역총국(防疫總局)을 설치하고 우롄더(앞줄 왼쪽 첫째)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사진 김명호] 1907년 이른 봄, 랴오닝(遼寧)성 뉘장(牛莊)에 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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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의 총성, 위안스카이 운명을 가르다
1910년 겨울, 동방잡지에 실린 위안스카이의 모습. 당(唐)대 산문가 유종원(柳宗元)의 시, 강설(江雪)의 마지막 구절인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외로운 배 위에 도롱이 걸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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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궁궐 마당서 석고대죄 후 낙향
1912년 1월, 위안스카이에게 권좌를 내준 짜이펑은 1924년 가을 장남 푸이가 자금성에서 쫓겨나자 자녀들과 함께 한동안 톈진으로 이주했다. 톈진 시절의 짜이펑과 자녀들.[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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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돈 먹은 만주귀족, 짜이펑 결단에 반발
섭정왕 짜이펑에겐 아들이 두 명 있었다. 오른쪽이 장남인 마지막 황제 아이신제뤄 푸이(愛新覺羅 溥儀). 왼쪽은 차남 푸제(溥傑). [사진 김명호] 서태후는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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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하면 군인 목을 쳐 군기 잡은 위안스카이
짜이펑의 친형 광서제는 네 살 때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 다음해인 1876년 자금성에서 황제로선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 김명호] 1898년 무술(戊戌)년, 개혁(變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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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하면 군인 목을 쳐 군기 잡은 위안스카이
짜이펑의 친형 광서제는 네 살 때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 다음해인 1876년 자금성에서 황제로선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 김명호] 1898년 무술(戊戌)년, 개혁(變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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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이펑, 광서제 배신한 위안스카이 제거 결심
독일인 교관의 안내로 참모들과 함께 신건육군(新建陸軍)을 열병하는 북양대신(北洋大臣) 위안스카이(가운데 작고 통통한 사람). 훗날 이 안에서 총통 5명이 배출됐다. 19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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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유런, 안중근 의사 쾌거에 “중국인이 본받을 일”
1948년 5월, 국민당 대표대회에서 부총통 후보 신분으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위유런(왼쪽 둘째).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 의거 당시의 하얼빈역 모습. [사진 김명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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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일본 대공황 해결… 한국에도 ‘만주 붐’
1935년 4월 일본을 방문한 부의(오른쪽)가 히로히토 일왕과 같은 마차에 타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1931년의 9·18 사변, 즉 만주사변 소식을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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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72) 신해혁명 밑거름 된 장즈퉁 총독의 ‘후베이 신정’
장즈퉁(왼쪽)은 외국인을 가장 많이 고용한 지방관이었다. 1906년 군기대신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18년간 후베이 신정(湖北新政)을 주관했다. 1903년 5월, 즈리(直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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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밑거름 된 장즈퉁 총독의 ‘후베이 신정’
장즈퉁(왼쪽)은 외국인을 가장 많이 고용한 지방관이었다. 1906년 군기대신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18년간 후베이 신정(湖北新政)을 주관했다. 1903년 5월, 즈리(直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