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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는 '깃털'이었다…싱 대사 도발을 읽는 '역사속 단서' [채인택의 세계 속 중국]

중앙일보

입력

이홍장(왼쪽)과 위안스카이(오른쪽)

이홍장(왼쪽)과 위안스카이(오른쪽)

주한 중국대사 싱하이밍(邢海明)의 발언 때문에 구한말 청의 군인으로 한성(서울)에 주재하며 내정 간섭을 일삼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1859~1916)가 새삼 불려 나오고 있다. 싱 대사는 지난 6월 8일 명동의 중국대사관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미리 적어온 메모를 꺼내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패배에 배팅하는 이들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점” 등의 발언을 하면서다.
(※중국 인명은 1912년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이전은 한국식 한자읽기로, 이후는 중국 한어 발음으로 표기하는 게 원칙인데, 위안스카이(袁世凱)는 그 전후에 걸쳐 활동했으므로 처음에는 둘을 모두 병기하고 그 뒤는 위안스카이로만 쓴다)

서구에 침탈되면서도 조선 속국화와 중화질서 유지 집념  

이에 따라 1882~1894년 조선에서 머물며 위세를 떨었던 위안스카이에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그가 조선에서 발호하던 당시의 중국 내부 사정과 국제정세, 그리고 조선과 청의 관계를 살펴보면 위안스카이는 깃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뒤에는 서구세력에 침탈당해 빈사의 상태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조선의 속국화와 내정간섭을 노리면서 경제적 이익과 중화질서 유지를 노렸던 중국의 의도가 자리 잡고 있다. 당시 청의 실권자였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1823~1901)이 그 몸통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살펴보면, 그런 중국의 실체나 국제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정파나 족벌의 이익을 앞세워 그들의 힘을 빌리려는 일부 국내 세력의 근시안적 사고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이홍장은 중국에선 난세의 장수로 통한다. 2000만~7000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19세기 역사의 비극인 1850~1864년 ‘태평천국의 난’ 당시 회군(淮軍)이란 민병대를 조직해 활약한 인물이다. 의용군인 상군(湘軍)을 편성해 일등공신이 된 증국번(曾國藩·1811~1872)에 이어 베이징 주변 수도권과 통상을 전담하는 북양통상대신(북양대신으로 통칭)을 맡아 중앙정부의 일인자가 됐다.

이홍장, 조미 수교 개입해 ‘조선은 청의 속국’ 명문화 압박

그런 이홍장은 1882년 5월 22일 조선의 전권대관 신헌(申櫶‧1810~1888)과 부관 김홍집(金弘集‧1842~1996)이 미국 전권위원인 로버트 슈펠트(1822~1895) 군함 타콘데로가호 함장과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당시 조선에 대한 외교적 간섭을 시도했다. 신헌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 체결도 맡았다.

그 배경은 이렇다. 1879년 미국을 출발해 세계일주에 나선 타콘데로가호는 일본을 거쳐 1880년 부산에 도착해 현지 일본 영사에게 조‧미 통상조약을 맺기 위한 중개를 요청했지만 불발됐다. 그러자 청으로 가서 실력자 이홍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이홍장은 1882년 3월 자신의 심복인 마건충(馬建忠‧1845~1900)과 북양수사(北洋水師‧아중에 북양함대로 바뀐 청의 해군)를 건설하고 있던 회군 부하장수 정여창(鄭汝昌‧1836~1895)을 사신 자격으로 조선의 제물포에 파견했다. 슈펠트는 이들의 중개로 그해 5월 22일 조선과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청이 슈펠트에 딸려 파견한 사신 마건충과 정여창은 조‧미 수호조약 체결 과정에서 ‘조선이 청의 속국이다’라는 문구를 조약 1조에 명문화하려고 시도했다. 이홍장이 이들에게 맡긴 임무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미국 측의 거부로 수호조약에 이를 명문화하지 못했다. 그러자 청은 조선을 압박해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조정했다. 청의 조선에 대한 집요한 종주권 주장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19세기 청나라는 제국주의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였다.

프랑스 유학 국제법 전문가 마건충도 ‘중화질서’

주목할 이물은 마건충이다. 마건충은 가톨릭교도로 1878년 프랑스에 파견돼 파리 시앙스포(파리정치대학)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2년 뒤 중국인으론 처음으로 프랑스 학사 학위를 받은 유학파 지식인이다. 그럼에도 중화주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태평천국의 난이 터지자 이홍장 휘하로 들어가 회군의 보급을 맡으면서 신임을 얻었다. 1895년 청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조선의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대만‧펑후(澎湖)제도‧랴오둥(遼東)‧반도를 일본에 떼어주는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을 맺을 당시 수행했다. 랴오둥은 일본의 지나친 팽창을 경계하는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당시 할양되지는 않았다.

백년국치 속 ‘약한 고리’ 조선에 ‘정신승리’ 노려  

주목할 점은 당시 중국의 상황이다. 청은 1839~1842년 영국과의 제1차 아편전쟁과 1856~1860년 애로호 사건에 이은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 등과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조계(외국인 거주지역)를 설치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불평등 조약을 맺는 치욕을 당했다. 청이 그나마 평등하게 맺은 통상조약은 1871년 일본과 맺은 것이 유일했다.

이렇게 중화질서와 자존심이 무너지고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청은 몰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중국 역사에선 이를 ‘100년 국치의 시대’가 시작된 때로 본다. 이렇게 서양 세력에 치욕을 당한 청은 조선과 통킹(북베트남)베트남 등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던 이웃 나라를 압박해 중화질서의 상징적인 복구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청은 조선과 통킹을 중국의 ‘정신승리’를 연출할 수 있는 약한 고리로 여겼던 셈이다.

임오군란으로 중전 민씨 일가가 파병 요청

이처럼 서양 세력의 침탈 속에서도 중화질서의 재확립의 기회를 노렸던 청의 실력자 이홍장은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7월 23일~8월 30일)이 발생하고 중전 민씨 일족이 청에 파병을 요청하자 이를 내정간섭의 기회로 적극 활용한다. 임오군란은 훈련도감의 구식군대가 무장 봉기를 일으켜 중전 민씨 일족을 내쫓고 1864~1874년 섭정을 하다 탄핵으로 물러났던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을 다시 옹립한 군사 정변이다. 훈련도감 군인들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밀려 해산하게 된 데다 13개월간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그나마 받은 쌀에 모래가 섞여있자 분노가 폭발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별기군은 1881년 주로 양반인 80명의 병력으로 신설돼 일본군 장교로부터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일본은 1875년 강화도 주변에서 무단으로 측량을 하던 자국 선박이 포격을 받자 영종도에 상륙해 교전한 운요(雲揚)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조선과 수교해 한양에 공사관을, 부산에 영사관을 설치했으며, 별기군의 훈련도 맡고 있었다.

임오군란이 터지자 중전 민씨는 장호원과 여주를 거쳐 충주로 피신했으며, 다급해진 민씨 일족은 7월 24일 당시 영선사(領選使)로서 유학생을 데리고 청의 톈진(天津)에 가있던 김윤식(1835~1922)과 어윤중(魚允中‧1848~1898)에게 청에 파병을 요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8월 2일 이를 접수한 김윤식과 어윤중은 청에 파병을 요청했으며, 청군과 함께 귀국했다.

당시 상을 당한 이홍장을 대신해 북양대신 직무대리를 맡고 있던 그의 부하 장수성(張樹聲‧1824~1884)은 이홍장과 의논해 즉시 파병을 결정했다. 책임자인 회군 출신 청나라 제독 오장경(吳長慶, 1834~1884)은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에서 군함 세 척과 상선 두 척에 3000명의 병력과 물자를 싣고 경기도 남양만의 마산포(오늘날 경기도 화성군 마산포)에 상륙했다.

책봉조공 관계는 내정 불간섭이 원칙…조선 파병은 전례 없어

임오군란 직후 청 군대가 조선에 상륙한 것은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에서 가장 비극적인 외교 참화라고 할 수 있다.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면서 오래도록 책봉과 조공 체계였다. 형식적으로 책봉을 받고 조공외교만 하면 중국은 조선의 독자성과 주권을 사실상 인정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조선은 병자호란(1636~1637)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에 항복한 ‘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 丁丑下城)’ 이후 청에 250여 년 동안 500회가 넘게 사신인 연행사를 베이징에 파견해 조공무역을 했다. 시작을 1644년 4월 청이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중국 본토로 들어간 입관(入關) 이후로 치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는 청이 1895년 청일전쟁 패전 직후 일본과 맺은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의 제1조에 ‘조선의 독립국임을 인정한다’고 명시해 책봉‧조공 체계가 무너질 때까지 계속됐다. 중국 연호 대신 개국기원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1894년 1차 갑오개혁까지로 치기도 한다. 동학란이 터진 1894년 서태후 육순 축하 진하사가 사실상 연행사였다. 당시 연행사는 산해관에서 베이징까지 철도로 갔으며, 청일전쟁으로 발이 묶었다가 나중에 선박으로 귀국했다.

이처럼 임진왜란(1592~1598) 기간 명나라의 파병과 정묘호란(1627) 당시 후금의 침략, 병자호란(1636~1637) 때 청(후금이 1636년 이름을 고침) 태종의 침입을 제외하고는 중국은 조선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으며, 내정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중국은 조선에서 누가 실권자가 되든지 신경쓰지 않았다.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의 파병은 이러한 전통적 관례를 무시하고 조선에 군대를 보내 내정을 무력으로 간섭한 첫 사례가 됐다. 책봉‧조공을 바탕으로 하는 종래의 동아시아 외교관계는 중국이 내부통치에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지켰으나, 임오군란 이후 청의 조선 파병은 이러한 양국 관계가 힘을 바탕으로 내정간섭을 시도하는 관계로 변질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23세 ‘낙방거사’ 위안스카이, 대원군 강제연행해 납치  

1882년 8월 12일 한성에 입성한 청군은 당시 낙동(駱洞)으로 불리던 명동을 중심으로 용산 등 한성 여러 곳에 나누어 주둔했다. 오장경은 당시 임오군란의 책임을 물어 귀양을 간 좌포대장 출신 이경하(1811~1891)의 낙동 집을 차지하고 본부로 삼았다. 바로 지금의 중국대사관 자리다.

한성 한복판에 자리 잡은 청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요인 납치였다. 오장경은 함께 온 마건충 등과 의논해 회담을 하자며 흥선대원군을 유인한 뒤 억류해 남양만으로 데리고 가서 배에 태워 중국 톈진(天津)으로 납치했다. 오장경의 부하인 하급 무관 위안스카이가 흥선대원군 억류와 납치에 앞장섰다.

위안스카이는 중원 한복판인 허난(河南)성 샹청(襄城)현 출신으로, 과거(科擧) 1차시험에 해당하는 향시(鄕試)에 두 차례나 떨어진 ‘낙방거사’였다. 과거로는 관직에 오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22살 때인 1881년 양아버지 원보경(袁保慶)의 인맥을 이용해 오장경의 휘하에 들어가 회군의 무관이 됐다. 이듬해인 1882년 임오군란으로 오장경의 군대가 출동하자 이를 따라 조선에 온 것이다.

조선을 호령하던 흥선대원군은 4년간 톈진의 보정부라는 관청에 억류됐다. 청은 한국의 내정에 대놓고 개입할 목적으로 요인 납치라는 범죄를 예사로 저질렀다. 이홍장은 파병한 군대를 움직여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제거하는 것으로 내정 간섭을 시작한 셈이다. 임오군란으로 몰락 직전에 이르렀던 중전 민씨와 그 일족, 그리고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제거되면서 회생해 친청 정권을 운영했다.

상민수륙무역장정에 ‘조선은 속국’ 명시

이홍장은 여기에 더해 1882년 10월 4일 자국의 허베이성 톈진(天津)에서 조선과 교역협정인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이란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 강화를 꾀했다. 이 조약은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명기했으며, 청은 이를 계기로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속국 지배를 시도했다. 조약의 전문에 조선은 오래 전부터 번봉국이었으며 수륙무역장정은 청이 이러한 속방에 은혜를 베풀어 특별히 우대하는 의미가 있다고 명시했다. 심지어 제1조에 청의 북양대신을 조선의 국왕과 동격으로 규정했다.

청에서는 실권자인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리훙장)과 그의 심복인 주복(周馥‧1837~1921)과 마건충(馬建忠)이, 조선에선 병조판서 조영하와 김홍집‧어윤중이 서명했다. 상민수륙무역장정은 조선이 중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형식의 조약이지만 조선에서의 청 조계지 설정과 수도 한성의 상업 개방, 청상을 도와줄 상무위원의 파견과 이들에 대한 치외법권 부여 등을 담은 불평등조약이다. 청이 주둔군을 등에 업고 조선에 일방적으로 강요한 불평등 조약으로 볼 수 있다. 서구 세력과 불평등조약을 맺으며 힘에 의한 현실주의 국제관계를 절감한 청이 조선에 거꾸로 이를 강요한 셈이다.

조약에는 조선인이 베이징에서 창고업‧운송업‧도매상‧점포운영을 할 수 있게 하면서 청 상인이 한성과 양화진에서 같은 업종을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조선이 다른 나라와 맺은 통상조약에는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속방우대’는 청이 조선과의 무역에서 특권을 배타적으로 독점해 조선의 내정과 통상을 지배하는 바탕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은 1884년 2월 조약을 개정해 청 상인의 조선 내부 통상권을 확대했다. 중국 상인이 조선 곳곳을 다니면서 장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성에 상주공관 설치하고 인천 등엔 치외법권 조계  

이에 따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추천을 받은 진수당(陳樹棠‧1828~1888)이 1883년 9월 16일 총판조선상무위원(總辦朝鮮商務委員)이란 관직을 받아 한성에 부임했다. 진수당은 상하이에서 20년 이상 해운회사를 운영하다가 청의 초대 주미공사인 진란빈(陳蘭彬‧1816~1895) 휘하에서 초대 주샌프란시스코 영사를 지냈다. 1882년 봄 귀국해서 이홍장의 막료로 일했다가 조선으로 발령받았다.

진수당은 1883년 9월 16일부터 1885년 9월 23일까지 2년간 재임하며 청 군대가 주둔한 한성 낙동의 이경하 대감 저택에 상무위원공서 사무실을 설치했다. 지금의 중국대사관 자리가 청 군대의 주둔지에서 외교공관으로 바뀐 계기다. 진수당은 군대를 배경으로 조선을 압박해 1883년 9월 한성에 상무위원공서(총영사관에 해당)를, 11월엔 인천에 상무위원부서(영사관)를 각각 설치했다. 청 상인을 위해 인천 등에 치외법권지역인 조계도 설치했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조선의 주청 공관은 베이징이 아닌 톈진에 설치됐다.

하지만 진수당은 1885년 4월 15일 시작된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귀국했다. 거문도 사건은 1887년 2월 27일 영국 함대가 철수하면서야 끝났다.

위안스카이, 갑신정변 진압하며 이홍장 신임 얻어

진수당이 떠나면서 후임은 오장경의 부하였던 젊은 위안스카이에게 넘어갔다. 위안스카이가 젊은 나이로 출세하게 된 계기는 1884년 12월 4일 조선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이었다. 이날 저녁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당은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자 민씨 일족은 한성에 주둔해 있던 청 군대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위안스카이가 12월 6일 병력 1500명을 이끌고 창덕궁에 쳐들어가 개화파를 진압했다. 조선의 정변을 청군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개화파의 득세는 삼일천하로 끝났다.

당시 청의 실력자인 북양대신 이홍장은 지금의 베트남 북부인 통킹의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벌인 청불전쟁(1884년 8월~1885년 4월)이 불리하게 진행되면서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다. 청은 결국 패배해 1885년 5월 프랑스와 톈진(天津)조약을 맺고 자국군을 통킹에서 철수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에서 친청 사대주의 성향의 민씨 정권에 대항해 발생한 갑신정변이란 정변을 위안스카이가 사흘 만에 진압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재확인했으니 그를 총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7월 가족을 데리고 중국으로 황급하게 탈출하기 전까지 10년 가까이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란 직함으로 조선의 내정을 대놓고 간섭했다. 조선의 군주인 고종에게 제대로 예의를 차리지 않은 것은 물론 폐위를 겁박하기까지 했다니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청일전쟁으로 귀국한 위안스카이, 배신의 아이콘으로  

위안스카이는 귀국 뒤 이홍장이 청일전쟁(1894~95) 패배의 책임을 지고 힘을 잃자 그 공백을 파고들어 군권을 장악해갔다. 군 개혁을 맡아 성공하면서 군의 중심 인사로 부상했다. 1898년 무술변법을 무력화한 서태후(1835~1908) 등 보수파의 군사쿠데타인 무술정변을 지원해 서태후의 신임을 얻었다.

무술변법(戊戌變法)은 1898년 6월 강유위(康有爲‧캉유웨이‧1858~1927)‧양계초(梁啓超‧량치차오‧1878~1929)‧담사동(譚嗣同‧탄스통‧1865~1898) 등이 광서제(光緖帝‧1871~1908,재위 1875~1908)를 움직여 시도한 정치‧사회 개혁이다. 변법자강(變法自强) 운동으로 청의 국력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103일 만인 9월 21일 서태후 등 보수파의 무술정변으로 좌절됐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피신했지만 담사동은 잡혀서 처형됐다. 100일의 개혁 천하를 무너뜨린 건 위안스카이의 무력이었다.

위안스카이는 1901년 이홍장이 세상을 떠나자 그가 맡았던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1901년 11월~1907년 9월)을 차지해 최고 실권자가 됐으며, 청의 2대(마지막) 내각총리대신(1911년 11월~1912년 2월)을 지냈다. 그러다 난징(南京)에서 신해혁명을 일으켜 중화민국 초대 임시 대총통을 맡은 된 손문(孫文‧쑨원‧1866~1925)과 손잡고 청의 멸망에 결정타를 날렸다. 위안스카이는 쑨원으로부터 실권을 위임받아 중화민국 임시정부 2대 임시대총통(1912년 3~10월)이 됐으며, 그 뒤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1913년 10월~1915년 12월)을 지냈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중화제국을 세워 초대 황제(1915년 12월~1916년 3월)에 올랐다. 하지만 국민의 반대 속에 즉위식도 열지 못한 채 퇴위하고 다시 중화민국 대총통(1916년 3~6월)을 맡았다가 요독증으로 숨졌다. 돤치루이(段祺瑞‧1865~1936)‧펑궈장(馮國璋‧1859~1919)‧장쭤린(張作霖‧1875~1929) 등 그의 부하들은 중국의 고질적인 군벌이 돼 중국을 분열시켰다. 쑨원이 제1차 국공합작을 한 것도 군벌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정도다. 결국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1887~1975)가 1923~26년 북벌을 마치고서야 중국은 재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조선을 중화질서 속의 속국으로 만들려던 이홍장의 의도에 맞춰 젊은 나이에 한성에서 위세를 떨친 위안스카이는 결국 청을 무너뜨리고, 신생 중화민국을 위기에 빠뜨릴 뻔한 중국 근대사의 재앙으로 기억된다. 이홍장과 위안스카이의 조선 속국화‧침탈 시도와 모욕 사례는 한반도에 큰 교훈을 남겼다. 국력이 모자라거나, 독자적인 외교전략과 지혜가 부족하거나, 정치가 분열되고 정쟁의 진창에 빠지면 사대와 속국화를 요구하는 중화주의가 언제든 한반도를 노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채인택 국제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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