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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44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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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을 털었다는 이유로 총살되기 직전의 항일 의용군들.1937년 12월 치치하얼 [사진=김명호]

1937년 7월 17일, 중국의 최고 통치자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침략자 일본과의 전쟁을 결심했다.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했다.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남과 북,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국가를 보위하고 영토를 수호할 책임이 있다.” 8월 초, 국민당 국방회의를 소집해 항일전쟁을 선포했다.

위안스카이에 총리로 뽑힌 탕샤오이, 칩거 중 의문사 #경성서 일하다 조선 여자와 결혼 #갑신정변 진압 때 두각 나타내 #정계 떠난 뒤엔 일본이 눈독 들여

동북에 만주국을 세워 재미를 본 일본 군부는 점령지 화북과 동남 지역에도 괴뢰정부 설립을 구상했다. 중국인 명망가 중에서 마땅한 사람을 물색했다. 일본 정보기관이 외교관과 국무총리, 대학 총장등을 역임한 탕샤오이(唐紹儀·당소의)를 접촉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탕샤오이라면 일본이 탐낼 만도 했다.

오해를 살 만도 했다. 몇 년 전 탕샤오이는 정계를 떠났다. 상하이에 칩거하며 두문불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모든 칩거가 그런 것처럼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오라는 곳도 없었다. 전쟁이 폭발하자 웬만한 사람들은 다들 후방으로 피신했다.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한 후에도 탕샤오이의 거처는 변함이 없었다. 태도도 애매했다. 일본이 제 발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이듬해 9월 말, 탕샤오이의 시신이 발견됐다. 정상정인 죽음이 아니었다. 한동안 암살설이 그치지 않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은 요물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전문 연구자 외에는 이름조차 들먹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국민당측은 물론이고 공산당 쪽도 마찬가지였다.

1953년 3월, 타이완의 국민당 정부는 미국과 공동방위조약 체결을 추진했다. 베이징의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협상 대표가 누군지 궁금했다.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이라는 보고를 받자 “탕샤오이의 사위 구웨이쥔”이냐고 물었다. 마오의 입에서 탕샤오이가 튀어나오자 다들 깜짝 놀랐다. 그간 탕샤오이의 이름은 금기(禁忌)에 속했다. 국민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이후 마오쩌둥은 탕샤오이를 여러 번 거론했다.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는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대총통에 취임하자마자 수 십년 간 호형호제하던 탕샤오이를 총리에 지명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내각책임제 총리를 지낸 사람이 퇴직 후 고향 현장(縣長)직을 자청했다. 지금 우리 당에는 이런 사람이 없다. 간부 교육에 활용토록 해라. 배울 점이 많다.”

같은 해 가을 미국 31대 대통령 후버가 회고록을 출간했다. 중일전쟁 초기 비명에 세상 떠난 탕샤오이를 극찬했다. “이상과 현실을 구분할 줄 아는, 정직하고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중국의 미래에 관한 원대한 포부를 들을 때마다 고개가 숙여졌다.” 19세기 말 중국에 체류했던 후버는 탕샤오이의 절친한 친구였다.

탕샤오이는 열두살 살 때 청 제국 관비유학생(留美幼童)에 뽑혔다. 7년 후, 컬럼비아 대학 1학년 때 본국의 소환장을 받았다. 귀국 후 톈진에서 학업을 계속하던 탕샤오이는 조선에 나가라는 명령을 받고 당황했다. “조선세관장으로 부임하는 멜렌돌프를 보좌해라.”

그게 바로 인생이라고 정의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엉뚱한 사람을, 그것도 우연히 만나는 바람에, 운명이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릴 때부터 객지 생활을 한 탕샤오이는 적응력이 뛰어났다. 멜렌돌프의 신임이 대단했다. 겁도 없었다. 조선 부임 2년 후, 일본을 등에 업은 귀족 자제들이 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조선 총독이나 다름없던 위안스카이는 진압 과정에서 탕샤오이가 맘에 들었다. 측근에 두고 무슨 일이건 의논했다. 나이도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사석에서는 호형호제했다.

위안스카이는 독신인 탕샤오이에게 조선여인도 소개해줬다. 성은 조(趙)씨, 빼어난 미인이었다. “조선남자들은 여자 부려먹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눌려 살아서 멍청해 보일뿐, 여자가 남자보다 우수한 나라다. 조선 여자와 결혼해라.”

30대 초반의 탕샤오이는 용산 세관장과 조선 총영사를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한국인들에겐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지만, 부친상으로 귀국하기까지 10년간 조선에서 활개를 쳤다.

리훙장(李鴻章·이홍장) 사망 후 직례총독(直隷總督)과 북양대신(北洋大臣)을 겸한 위안스카이는 부인 조씨와 함께 귀국한 탕샤오이를 중용했다. 청나라 말기, 중국외교와 철도 건설, 세무(稅務), 우정(郵政)사업은 탕샤오이의 독무대였다.
1911년 청나라가 막을 내렸다. 혁명세력은 공화제를 표방했다. 이듬해 2월, 난징(南京) 참의원은 위안스카이를 임시 대총통에 선출했다. 취임식을 마친 위안스카이는 탕샤오이를 초대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변할 줄 알아야 인간이다. 권력을 쥐고도 변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탕샤오이는 내각책임제의 신봉자였다. 사사건건 위안스카이와 충돌했다. 총리직을 내 던지고 남방의 혁명세력과 합류했다. 혁명세력도 본질은 위안스카이와 다를 게 없었다.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이상주의자 탕샤오이가 설 곳은 중국 천지에 없었다. 그럴수록 명망은 더 올라갔다. 일본이 이런 탕샤오이를 내버려 둘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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