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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 점원’ 옌 신허우, 중국 최대 은행 1인자 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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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호 29면

옌유윈과 양광성의 결혼식. 신부 들러리의 오른쪽 뒤 남자가 옌쯔쥔. 신랑 양광성의 뒤는 중국 최초의 IOC 위원인 국무총리 왕정팅(王正廷). 1929년 9월 8일 상하이. [사진 김명호]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 중국의 국가원수는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었다. 장쭤린은 국제무대에서 보여준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의 능력을 높이 샀다. 무슨 자리건 맡아 달라고 사람을 보냈다. 번번히 거절 당하자 꾀를 냈다. “외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라고 들었다. 나는 이런 전쟁은 할 줄 모른다. 외교사절과 접견하는 자리에는 참석해 주기 바란다. 국가의 이익이 걸린 문제다.” 구웨이쥔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장쭤린이 동북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장쭤린과의 왕래가 빈번하다 보니,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도 저절로 알게 됐다. 장쉐량은 열두살 위인 구웨이쥔을 잘 따랐다. 골프장은 물론이고 여자 친구 만날 때도 같이 가곤 했다. 여자 취향이 제 각각이라 마찰은 없었지만,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만은 예외였다. 장쉐량의 호기심과 황후이란의 끼가 화근이었다. 구웨이쥔은 모른 체했다. “부인들이 뭐하고 다니는지 아는 사람은 세상 천지에 없다. 나는 내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


장쭤린이 일본군에게 폭사 당한 후 아들 장쉐량이 동북의 대권을 장악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연합해 전국의 2인자로 부상한 장쉐량은 캐나다에 정착한 구웨이쥔에게 귀국을 종용했다. “체포령은 형식에 불과하다. 돌아올 준비를 해라. 부인도 꼭 데리고 와라.”


장제스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외교관을 물색할 때였다. 장쭤린·장쉐량 부자와 구웨이쥔의 관계도 잘 알고 있었다. 장쉐량의 청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외교문제가 산적해 있다. 정부를 위해 일할 생각이 있다면, 명예회복을 책임지겠다.” 구웨이쥔은 장쉐량의 통치 지역인 베이징으로 귀국했다. 장제스의 중앙정부가 있는 난징(南京)엔 갈 생각도 안 했다. 선양(瀋陽)과 베이다이허(北戴河)를 오가며 자문에만 응했다.


구웨이쥔의 생모가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내려온 구웨이쥔은 상하이 시장이 빈소를 지키는 것을 보고 의아했다. “장제스 위원장의 지시를 받았다”는 말을 듣자 머리가 복잡했다. 장례를 마치자 시장이 설득에 나섰다. “나와 함께 난징으로 가자. 체포령도 이미 철회했다.” 구웨이쥔은 고개를 흔들었다.


난징에서 달려온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쑹쯔원(宋子文·송자문) 남매도 외교와 정치에서 손을 떼겠다는 외교 귀재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나는 외교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외교는 국가의 이익만 염두에 두면 된다. 정치는 당파의 이익만을 추구해도 뭐랄 사람이 없다. 정치에는 흥미를 느껴본 적이 없다. 외교가 각 정파의 이익에 휘둘리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더 이상 끼어들고 싶지 않다.”


이 무렵, 상하이의 다화호텔(大華飯店)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하객의 면면이나 규모가 2년 전 같은 곳에서 열린,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결혼식에 버금갈 정도였다. 청년 시절, 신부 할아버지에게 도움 받은 적이 있던 구웨이쥔도 초청을 받았다.


신랑 양광성(楊光?·양광생)은 국민정부의 외교부 상하이 특파원, 2년 전인 스물 일곱 살 때 칭화대학 국제법 교수와 외교부 고문을 역임한 당대의 준재였다. 삐쩍 말라 보였지만, 프린스턴대학 유학 시절 골프와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을 독차지할 정도로 건장했고, 성격도 좋았다. 사교성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대형 비단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이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릴 때부터 입만 열면 아들에게 일렀다. “자라서 구웨이쥔 같은 외교관이 되라. 외교는 별 게 아니다. 남녀관계와 흡사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외교관들은 한결같이 여자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고 뒤처리가 깔끔했다. 플레이보이 기질이 없는 사람은 외교관 자질이 없다. 구웨이쥔을 본 받아라. 돈은 내가 대마.”

상하이 상무총회(商務總會)회장 시절의 옌신허우. 중국 동남부 제1의 부호였다. [사진 김명호]

신부 옌유윈(嚴幼?·엄유운)은 옌신허우(嚴信厚·엄신후)의 손녀였다. 저장(浙江)성 닝보(寧波) 출신인 옌신허우는 어릴 때부터 자립심이 강했다. 고향의 전당포 점원을 거쳐, 열일곱 살 때 상하이에 나와 금은방에 일자리를 구했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옌신허우가 직례총독 리훙장(李鴻章·이홍장)에 발탁된 배경은 미궁 투성이다.


당대의 권력자에게 신임을 받은 시골 청년은 부동산과 무역에 눈을 떴다. 베이징과 상하이, 광저우의 요충지에 닥치는 대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상하이에 눌러 앉았다.


옌신허우는 방직과 제분에도 손을 댔다. 현대식 기계를 갖춘 중국최초의 기업인이기도 했다. 중국 최대의 금융기관인 통상은행(通商銀行)의 초대 총장도 옌신허우외에는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상하이 상공회의소 초대 주석도 마찬가지였다.


옌신허우는 자손이 귀했다. 옌유윈의 아버지 옌쯔쥔(嚴子均·엄자균)은 버는 것보다 쓰기를 좋아했다. 자선사업가로 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였다. 결벽증도 심했다. 자녀들에게 한번 입은 옷은 다시 못 입게 했다. 친구도 적었다. 훗날 사위가 되는 구웨이쥔과 장쉐량 외에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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