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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일본 대공황 해결… 한국에도 ‘만주 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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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호 26면

1935년 4월 일본을 방문한 부의(오른쪽)가 히로히토 일왕과 같은 마차에 타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1931년의 9·18 사변, 즉 만주사변 소식을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애신각라(愛新覺羅) 부의(溥儀)는 천진의 일본조계지 안에 있는 장원(張園)에서 들었다. 선조들의 고향이 관동군에 유린되고 있다는 소식을 일본조계지 안에서 들어야 했던 부의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이다. 부의는 제국에 암운이 짙게 드리던 1906년 청조(淸朝)의 11대 광서제(光緖帝)의 동생 순친왕(醇親王) 재풍(載<7043>)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도광제(道光帝)였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만주국 ⑥일제와 손 잡은 부의

그의 운명은 태어난 지 세 살이 채 안 된 1908년 서태후(西太后)가 임종을 앞둔 광서제의 후사(後嗣)로 지명함으로써 역사의 격랑 속에 빨려 들어갔다. 그해 11월 14일 서른일곱의 광서제가 독살설 끝에 세상을 떠나자 부의가 즉위해 선통제(宣統帝)가 되는데 서태후는 부의의 부친 순친왕을 섭정왕(攝政王)으로 삼아 어린 아들을 대신하게 했다.

2007년 광서제의 유발(遺髮:머리카락) 조사 결과 비소(砒素)가 검출되어 독살 의혹은 더욱 커졌는데 각각 서태후와 원세개(袁世凱)의 소행이란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부의는 1960년 자서전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에서 원세개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지만 자신의 황위를 빼앗은 원세개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여 아직도 광서제 사망의 진상은 분명치 않다.

1 만주국 지도, 1934년. 2 만주국 수도였던 장춘(당시 이름은 新京)에 있던 관동군 사령부. 사실상 만주국의 최고통치기관이었다.

부의를 다시 황제로 추대한 장훈복벽사건
1911년 손문(孫文)이 주도하는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순친왕은 원세개를 끌어들였지만 그는 혁명파와 손을 잡고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때 조선에 파견되기도 했던 원세개는 선통제 부의의 퇴위를 요구했고 협상 결과 청나라 조정과 중화민국 정부 사이에 ‘청제퇴위우대조건(<6E05>帝退位優待條件)’이 체결되었다. 골자는 부의는 퇴위 후에도 ‘대청황제(大<6E05>皇帝)’란 존호를 그대로 유지하며 황궁(皇宮:자금성 및 이화원)에서 생활하는 한편 정부로부터 매년 400만 냥의 생활비를 지급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부의는 명목상의 황제로 환관·궁녀들과 자금성에서 살았다.

그런데 황제 자리에 욕심이 난 원세개가 1915년 12월 제정(帝政) 부활을 선언하고 이듬해 원일(元日) 제위에 올랐다. 하남(河南)성 항성(項城)의 한미한 가문 출신 원세개의 즉위에 대해 북양(北洋)군벌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반대가 들끓자 원세개는 3월 퇴위했고 6월에는 사망했다.

이 무렵 부의는 두 번째 황제로 추대된다. 북양군벌의 장령이었던 장훈(張<52F2>)이 1917년 7월 1일 청조 부활을 선언하면서 부의를 복위시키고 자신은 의정대신(議政大臣)과 직예총독(直隷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이 된 것이다. 그러나 12일 만에 군벌 단기서(段祺瑞)에게 패해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도주했는데 이를 장훈복벽사건(張<52F2>復<8F9F>事件)이라고 부른다.

1919년 5월 부의는 중국어에 능통했던 영국인 관료 존스턴(Reginald Fleming Johnston·1874~1938)을 가정교사로 삼아 서구식 문물교육을 받았다. 훗날 자금성의 황혼(Twilight in the Forbidden City)을 쓰는 존스턴은 부의에게 헨리(Henry)라는 서구식 이름을 지어 주었다. 1922년 결혼한 황후 완용(婉容)이 북경 태생의 미국인 가정교사 이사벨 잉그램에게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받아 부부가 모두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부의가 일본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1923년 9월 일본의 관동(關東)대지진이었다. 지진 소식을 접한 부의는 요시자와 겐기치(芳澤謙吉) 일본 공사에게 자금성 내에 있는 보석 등을 의연금으로 전달했고 일본 정부는 대표단을 보내 부의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여기에 1924년 10월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이끄는 봉천군과 조곤(曹琨)·오패부(吳佩孚)·풍옥상(馮玉祥) 등이 이끄는 직예파(直隷派) 군벌이 맞붙는 제2차 봉직전쟁(奉直戰爭)이 발생하면서 부의는 더욱 일제와 가까워지게 된다. 봉직전쟁에서 승리해 북경을 차지한 풍옥상이 ‘청제퇴위우대조건’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는 부의를 자금성에서 내쫓았던 것이다.

마지막 황제의 안식처를 빼앗은 이 조치는 부의를 일본과 결탁하게 만든다. 당초 부의의 측근 정효서는 존스턴에게 상해나 천진에 있는 영국이나 네덜란드 공관으로 들어갈 수 있게 배려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내정간섭 우려가 일 것을 우려한 영국이 거부했다. 반면 관동대지진 때 인연을 맺은 요시자와 일본 공사는 즉각 부의의 요청을 수락하고 1924년 11월 북경의 일본공사관으로 들어오게 했고, 1925년 2월에는 천진의 일본조계지 내 장원으로 옮겼던 것이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를 일본 영사관이 관리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천진의 일본조계지에서 식객 노릇을 하던 부의는 선황들의 능(陵)이 도굴당하는 동릉사건(東陵事件)을 겪고 충격에 빠진다. 하북(河北)성 준화(遵化)시 창서산(昌瑞山)에 자리 잡은 동릉은 세조 순치제(順治帝)의 효릉(孝陵), 성조 강희제(康熙帝)의 경릉(景陵), 고종 건륭제(乾隆帝)의 유릉(裕陵), 문종 함풍제(咸<8C50>帝)의 정릉(定陵), 목종 동치제(同治帝)의 혜릉(惠陵) 등 5명의 황제릉과 자희태후(慈禧太后:서태후)의 정동릉(定東陵) 등 여러 황후의 능이 있었다.

그런데 국민혁명군 제12군 군장(軍長) 손전영(孫殿英) 군대가 건륭제의 유릉(裕陵)과 서태후의 정동릉을 도굴했다. 부의는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손전영이 이미 국민당 간부에게 손을 써 놓았기 때문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부의는 동릉사건 때 자금성 추방 이상의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천진의 일본조계지에서 울분을 삭이고 있던 부의에게 드디어 9·18 사변 소식이 전해졌다. 부의는 중국 정국에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지만 무대가 만주라면 사정이 달랐다. 게다가 만주를 둘러싼 국제 정세도 부의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당초 만주 침략을 기획했던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간지의 구상은 만주를 점령지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주를 일본이 직접 지배하는 것은 1922년 워싱턴회의에서 체결된 9개국 조약에 직접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포르투갈에다 일본과 중국까지 가입한 9개국 조약(Nine-Power Pact)은 각국 해군의 감축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중국의 주권·독립·영토보전에 관한 내용도 담고 있었다. 이 때문에 관동군은 만주를 직접 통치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만몽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중국의 행정적 지배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겠다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한국에도 영향
만주사변 발발 나흘 뒤인 1931년 9월 22일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 대좌, 이시하라 간지 중좌 등이 이런 내용 등을 담은 만몽문제 해결책안(解決策案)을 만들었다. 동북4성(길림·흑룡강·요녕·열하) 및 몽고를 영유해서 선통제(부의)를 우두머리로 삼는 신정권(新政權)을 수립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부의로서는 일본의 제의를 거부할 까닭이 없었다. 부의는 나아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와 일종의 충성맹세 비슷한 비밀협약을 맺었다. 새로 수립될 만주국의 외교, 치안, 국방과 국방상 필요한 모든 시설(철도·항만·수로·항공로)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일본에 위임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만주국 중앙 및 지방의 주요 인사에 대해서도 일본의 ‘지원과 지도’에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부의는 더한 사항이라도 양보할 생각이 있었다. 부의가 바란 것은 황제(皇帝)라는 칭호뿐이었는데 그나마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은 시기상조라면서 부의를 황제가 아닌 집정(執政)으로 결정했다. 부의는 이런 과정을 거쳐 천진의 일본조계지에서 6년 만에 나와 1931년 11월 13일 여순(旅順)의 남만주철도회사가 운영하는 대화(大和:야마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동양의 마타하리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김벽휘)는 천진에 잔류하고 있던 황후 완용(婉容)을 수행해 여순으로 향했다. 관동군의 공작을 받은 장경혜(張景惠)는 동북(東北)행정위원회 명의로 1932년 2월 18일 장개석의 국민정부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3월 1일에는 만주국(滿洲國) 건국 선언을 했다.

동북4성의 광대한 영토와 3400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만주국은 이렇게 역사에 등장했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홀연히 나타나 일본의 대공황을 일거에 해결하고 기근과 인구과잉에 시달리던 식민지 한국민에게도 ‘만주 붐’을 일으켰다가 군국 일제의 패망과 함께 갑자기 사라졌던 수수께끼 왕국이었다.

그러나 만주국이 한국사에 끼친 잔영은 깊고도 길다. 대표적인 예가 만주국에서 1937년부터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1961년 5월 15일 민주당 정부의 부흥부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는데 부흥부 차관 김준태(金濬泰)가 만주국 대동학원 출신이다. 1962년부터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