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유런, 안중근 의사 쾌거에 “중국인이 본받을 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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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호 29면

1948년 5월, 국민당 대표대회에서 부총통 후보 신분으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위유런(왼쪽 둘째).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 의거 당시의 하얼빈역 모습. [사진 김명호]

‘民呼日報’는 창간과 동시에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청나라 정부의 실정(失政)을 매도하는, 위유런(于右任)의 품위 있는 문장은 굉음(轟音)을 연상케 했다. 만화까지 곁들이다 보니 선전효과도 있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8>

청(淸) 황실의 民呼日報와 위유런에 대한 저주는 상상을 초월했다. 황제의 생부였던 섭정왕(攝政王) 짜이펑(載沣·재풍)조차 “책임자의 눈깔을 파내고 싶다(要挖掉負責人的眼睛)”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다녔다. 무능과 점잖음을 겸비한 짜이펑이 이런 표현을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창간 79일 만에 위유런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면회 온 기자들에게 “신문을 하루도 거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기자들이 회의를 열었다. “이러다간 소송이 그칠 날이 단 하루도 없다. 사장부터 감옥에서 꺼내자. 사장 모르게 폐간 공고를 내고, 풀려나면 다시 창간하자.” 民呼日報가 문을 닫는 날 위유런은 조계(租界)를 떠나라는 판결을 받았다.

감옥 문을 나선 위유런은 여전했다. 民吁日報를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두 눈을 잃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呼의 점 두 개를 뺀 吁로 바꾼 것 외에는 바뀐 게 아무것도 없었다.

창간 23일 후, 안중근 의사의 쾌거를 접한 위유런은 정부의 보도금지를 한 귀로 흘렸다. 조선 남아의 쾌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조국을 침탈한 원수의 목에 총구를 겨눈 것은 당연하다. 중국인이 본받을 일이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던 전 직례총독(直隷總督)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는 안 의사의 의거를 최초로 보도한 위유런의 언론관을 높이 평가했다. 1년 후, 안 의사의 순국을 애도하는 시를 위유런에게 보낼 정도였다. “평생 할 일을 단숨에 끝냈다. 죽을 곳에서 살기를 도모하면 장부가 아니다. 삼한 땅에 태어나 만방에 명성을 드높였다. 백 년을 사는 이 없는 법, 한 번 죽음으로 천 년을 살 사람.(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圖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

만주족 정권인 청나라 정부는 위유런을 다시 감옥으로 보냈다. 인쇄용지의 공급도 차단시켰다. 위유런은 옥중에서 民吁日報의 폐간 소식을 들었다.

위유런은 얻어터지면 터질수록 의지가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출옥 후 더 큰 신문사 설립을 서둘렀다. 생면부지의 차(茶) 상인이 돈뭉치를 들고 찾아왔다. “대대로 차 장사를 했다. 돈이 모이자 할아버지는 술, 여자, 아편을 좋아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달랐다. 어릴 때부터 내 볼 쓰다듬으며 저런 거 본받지 마라, 돈 벌면 나라 위해 쓰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할머니 말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모아둔 돈이 꽤 있지만 나는 나라를 위해 쓸 재간이 없으니 대신 당신이 해라.”

신해혁명 1년 전인 1910년 10월 11일, 위유런은 차 상인이 놓고 간 돈으로 ‘民立報’를 창간했다. 순식간에 당대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했다. 위유런이 사오신(騷心)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300여 편의 글은 지식인들의 피를 끓게 하고도 남았다.

民立報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청년 마오쩌둥이었다. 촌뜨기들 앞에서 아는 척하기 좋아하던 시골 사상가를 혁명가로 이끈 것이 民立報였다. 1936년 옌안을 방문한 미국 기자 에드가 스노우에게 民立報를 거론하며 위유런에 대한 존경을 숨기지 않았다. “사범학교 시절, 民立報를 볼 때마다 감동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고향 사람 황싱(黃興·황흥)이 광저우에서 혁명군을 일으켜 72열사가 순국한 소식이나 쑨원(孫文·손문)의 이름을 民立報를 보고 처음 알았다. 위유런의 글을 접하기 전까진 개혁과 혁명을 구분하지 못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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