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이펑, 광서제 배신한 위안스카이 제거 결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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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호 29면

독일인 교관의 안내로 참모들과 함께 신건육군(新建陸軍)을 열병하는 북양대신(北洋大臣) 위안스카이(가운데 작고 통통한 사람). 훗날 이 안에서 총통 5명이 배출됐다. 1905년, 톈진(天津). [사진 김명호]

중국인들의 뇌리에 사실처럼 자리 잡은 전설이 있다. “짜이펑이 형 광서제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 제거를 결심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26>

짜이펑이 섭정왕에 취임하자 만주 귀족들은 “위안스카이를 죽여야 한다”며 부글부글 끓었다. 방법까지 제시했다. “위안스카이는 매일 아침 조정에 나온다. 날고 기는 경호원들이 에워싸고 있지만 자금성 안에 들어오면 홀몸이 된다. 어전시위를 동원해 숨통을 끊어버리자.” 짜이펑은 무능하고 합리적인 모순덩어리였다. 위안스카이 처형에 동의하면서도 명분을 찾느라 전전긍긍했다. 그만큼 위안스카이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위안스카이는 진사(進士)를 두 명 배출한,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시험 운은 없었다. 20세 때 향시(鄕試)에 낙방하자 학문으로 관직에 나가겠다는 꿈을 접었다.

대청제국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공개적으로 관직을 사고팔았다. 관료사회가 난장판과 비슷했다. 위안스카이도 대대로 내려오는 골동품을 처분한 돈으로 관직을 샀다. 아무 권한도 없는 허직(虛職)이었다. 돈 싸 들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은 절망의 도시였다. 시골 청년을 상대해주는 고관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본전이라도 찾겠다며 도박장을 드나들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가친척이라는 사람들은 남보다 더했다. 반 거지 차림으로 돌아온 위안스카이를 반기지 않았다. 한때 우리나라도 가출소년들이 돈 떨어지면 군에 자원 입대하던 시절이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군문을 두드렸다. 22세 때였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好男不當兵, 好鐵不打釘(멀쩡한 사내는 군인이 되지 않고, 좋은 철은 못이 되지 않는다)’을 당연시 여길 때였다.

군인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10년간 머무르며 기반을 닦았다. 군과 외교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95년,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군제 개편을 단행했다. 조선 체류 시절, 군수품 조달과 훈련능력을 인정받은 위안스카이에게 신군(新軍) 건설을 위임했다.

불과 2년 만에 위안스카이는 흔히들 북양군(北洋軍)이라 부르는 신건육군(新建陸軍)을 만천하에 선보였다. 지금으로 치면 허베이(河北)성 부성장 격인 직례안찰사(直隷按察使)로 승진한 후에도 신군 훈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38세 때였다.

1년 후 청 왕조와 위안스카이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광둥(廣東) 출신 캉유웨이(康有爲)를 주축으로 한 유신세력이 황제 광서제와 손잡고 개혁을 추진했다. 위안스카이도 개혁에 동조했다. 자신을 발탁해준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을 찾아가 퇴진을 요구했다. 욕만 바가지로 먹고 쫓겨나도 뜻을 바꾸지 않았다.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태후의 압력이 만만치 않았다. 광서제와 캉유웨이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광서제는 위안스카이에게 시랑(侍郞) 벼슬을 내렸다.

캉유웨이는 서생(書生)다웠다. 위안스카이에게 무모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군대를 몰고 이화원(頤和園)을 포위해라. 서태후를 제거해야 한다.” 위안스카이가 “펄펄 끓는 물과 화염 속에 뛰어드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자 일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라며 후난(湖南) 청년 탄쓰퉁(譚嗣同·담사동)을 파견했다.

1898년 8월 3일(음력) 늦은 밤, 탄쓰퉁은 위안스카이가 머물고 있는 사찰을 방문, 정변 계획을 밝혔다. 두 사람이 나눴다는 대화가 여러 문헌에 남아 있다. “황제는 너를 신임한다. 지금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 직례총독을 살해해라. 병력을 몰고 베이징에 들어와 이화원을 포위해라.” 위안스카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이화원을 포위하는 목적을 알고 싶다.” 탄쓰퉁은 거침이 없었다. “늙은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존할 수 없다. 너는 포위만 하면 된다. 나머지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여기서 늙은이는 서태후를 의미했다. 실패하면 멸족(滅族)을 당하고도 남을 내용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승산 없는 싸움은 안 하는 사람이었다. “베이징과 톈진 일대에 총독의 군대가 널려 있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만 명이 채 안 된다. 총은 있어도 실탄이 없다.” 탄스퉁은 냉소를 지었다. “지금 네 목숨이 내 손안에 있는 것처럼, 내 목숨은 네 손안에 있다. 오늘 밤 안으로 결정해라.” 위안스카이는 거절하지 않았다.

3일 후, 이화원에 있던 서태후가 자금성에 들이닥쳤다. 광서제를 연금시키고 복귀를 선언했다. 톈진에서 소식을 들은 위안스카이는 총독에게 달려가 유신파들의 이화원 포위계획을 이실직고했다.

이 일을 계기로 위안스카이는 승승장구했다. 자금성의 외딴 건물에 안치된 광서제는 10년간 위안스카이를 저주하다 세상을 떠났다. 매일 허수아비에 위안스카이 이름을 붙여놓고 화살을 쏴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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