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맹서 애증까지:고수석의 북·중 돋보기] ⑨ 후진타오와 김정일 Part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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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에 걸쳐 후진타오의 화평발전(和平發展)이 어떻게 후진타오와 김정일과의 관계에 적용됐는지 이론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론은 설명하는 입장에서는 현학적이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지루한 것 같습니다. 다시 스토리 중심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보지요.

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15분. 후진타오는 제16기 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6중 전회, 10월 8~11일)를 진행하다가 깜짝 놀라운 보고를 받지요. 20분 뒤에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다는 내용이었지요. 김정일이 이런 중요한 일을 사전 협의도 없이 20분 전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었지요.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는 2시간 전에 알려준 것과 대조적이었지요. 후진타오는 몇 개월 전부터 그렇게 달랬었건만 결국 눈 앞의 현실로 드러나자 망연자실한 뿐이었지요. 그는 긴급회의를 소집해 중앙외사영도소조 (조장 후진타오)와 외교부 보고를 듣고 대책을 논의했지요. 중앙외사영도소조는 중국의 대외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하는 기구입니다. 후진타오는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중국의 입장을 발표하지요.

루젠차오(劉建超) 대변인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悍然)로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했지요. 여기서 쓰인 ‘제멋대로(悍然)’ 라는 표현은 중국어에서 극도로 분개할 경우에 사용하는데, 1969년 소련(우수리강 국경분쟁)과 1979년 베트남(국경분쟁)과 무력충돌 때 사용했다가 27년 만에 외교부 대변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요. 후진타오에 대한 김정일의 분노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2003년 3월 국가주석이 된 이후 후진타오는 북한 핵을 유심히 지켜보았지요.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과 이로 인한 대중 압박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 29일 연두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고, 이에 앞서 미국 국방부는 2002년 1월 8일 의회에 핵태세보고서(NPR, Nuclear Posture Review)를 제출하면서 선제 핵공격과 실전용 소형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의지를 담았지요. 과거 미국의 핵전략은 상대방이 핵을 먼저 사용하지 않는 한 핵으로 보복하지 않고, 비핵국가에 대해서는 핵무기 사용을 통해 위협하지 않는 소극적인 안정보장 개념이었지요. 북한은 이런 미국의 입장 변화에 ‘일사불전’의 자세를 취하게 되었지요.

후진타오는 이런 대외적인 악조건에서 취임했고, 미국은 그에게 북한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지요. 미국은 중국이 그럴 수 있다고 믿었고요. 하지만 미국의 생각과 달리 북한은 중국의 압력에 순순히 응하지 않지요. 아직도 학계에서는 중국의 대북 영향력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요. 일부는 미국의 시각처럼 그 동안의 북중 관계를 고려하면 중국이 압력을 행사하면 북한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반면에 중국의 주장대로 북한도 엄연한 주권국가이기 때문에 중국이 압력을 행사하더라도 선별적으로 따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 동안 논쟁의 결과를 보면 후자가 판정승을 거둔 셈이지요. 즉 중국이 북한에 어느 정도 압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압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후진타오가 선택한 것은 ‘적극적인’ 설득이었지요. 그 가운데는 강력한 압력도 포함돼 있었지요. 그는 우선 제2차 북핵 위기를 대화로 풀기 위해 6자 회담을 기획하고 2003년 8월부터 차분히 진행하지요. 하지만 미국과 북한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난항을 거듭했지요. 그때마다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2003년 10월 29~31일), 리창춘(李長春) 정치국 상무위원 (2004년 9월 10~13일), 탕자쉬안(唐家璇) 국무위원 (2005년 7월 12~14일), 우이 (吳儀) 부총리(2005년 10월 8~11일), 후이량위(回良玉) 부총리 (2006년 7월 10~15일) 등을 보냈지요. 그리고 이들이 방북할 때는 경제 지원도 포함돼 있었지요. 우방궈 상무위원장이 방북할 때는 북한의 요구대로 대안친선유리공장을 건설해 주기도 했지요. 건축 비용은 약 2,400 만 달러가 소요됐지요. 이것만으로 부족해 김정일을 2004년 4월과 2006년 1월 등 두 차례 중국으로 초청했고, 자신도 2005년 10월 평양을 방문했지요.

후진타오가 평양에 갔을 때 그는 작심한 듯 김정일에게 중국의 경제 발전과 개혁·개방의 성과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면서 설명했지요. 그는 “1974년부터 2004년까지 중국은 연평균 9.4%씩 성장해 국내 총생산액이 1,473 달러에서 1조 6,494 달러로 늘어났습니다. 2004년 말까지 중국에서 실제로 사용한 외국 직접 투자액은 누계로 5,621억 달러에 달합니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가장 큰 개발도상국으로써 인구가 많고 기초가 약하며 발전이 매우 고르지 못하고 발전 과정에서 여전히 적지 않는 두드러진 모순과 문제들이 있지요. 그래서 지금 중국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의기 분발하여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을 떼밀고 나가고 있으며 초보적으로 부유한 사회를 전면적으로 건설할 데 대한 웅대한 목표를 실현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위업의 새로운 국면을 끊임없이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지요.

후진타오는 중국식 사회주의의 성과를 설명함으로써 김정일에게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간접적으로 강조했지요. 이는 덩샤오핑이 1983년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에게 개혁·개방의 성과와 문제점을 설명한 것과 비슷하지요. 비록 개혁·개방은 어렵지만 극복할 수 있는 선택이라는 말이었지요.

후진타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결국 핵을 선택했지요. 후진타오는 참을 만큼 참았는지 행동으로 그의 의지를 표현하지요. 그래서 중국은 북한이 핵실험을 한 지 4일 만에 열린 유엔 대북 제재 결의안 1718호에 찬성표를 던지지요. 1718호는 군사적 공격을 제외한 모든 경제 제재가 포함돼 있지요. 류젠차오 대변인은 “북한은 반드시 국제사회의 호소에 긍정적 반응을 보여야 하며, 빠른 시일 내에 6자 회담에 복귀해야 합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중국은 유엔의 각종 결의안을 성실히 이행할 것이며, 1718호 결의안을 엄격히 준수할 것”이라고 밝히지요.

중국은 이처럼 한반도의 비핵화의 원칙 속에서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엄중한 문책과 제재의 동참을 호소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우려해 핵실험에 대한 군사행동에는 반대했지요.

다음은 후진타오와 김정일-4 편이 이어집니다.

☞고수석 기자는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를 거쳐 통일문화연구소에서 북한 관련 취재를 했다. 중앙일보 전략기획실 차장. 고려대에서 ‘북한· 중국 동맹의 변천과정과 위기의 동학’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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