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죄만 받으면 눈 감아도 여한 없어"…위안부 길 할머니의 하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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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가며~마침내 올 해방세상 주춧돌이 될~바위처럼 살자꾸나.”

7일 정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축년 첫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가 열렸다. 시작은 언제나처럼 노래 ‘바위처럼’을 부르는 것이었다. 1992년 1월 8일 첫 집회를 시작으로 올해로 17년째 제 847차 집회다. 위안부 피해자였던 길원옥(82) 할머니는 오늘도 어김없이 맨 앞자리에 앉았다. 꼬박 7년째다. 길 할머니는 영하권의 쌀쌀한 날씨 탓에 옷 수 겹을 껴입고 빨간 벙어리 장갑과 파란 마스크로 중무장했다. “(일본이) 회개할 것이 많을텐데 저렇게 반성을 안해요.” 길 할머니는 기약없는 일본정부의 반성과 사과를 오늘도 기다린다.

1시간여 끝에 집회는 막을 내렸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었지만 함께 자리를 지켜준 이들 때문에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단다. 길 할머니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식구들과 점심을 먹고 서울 서대문구 경기대 앞에 있는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이곳은 나눔 쉼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3명이 함께 살고 있는 작은 집이다.

길 할머니와의 대화가 어렵사리 시작됐다. ‘이것 저것 묻는 것이 겨우 아문 상처를 덧나게 하지 않을까’고민이 됐다.

“7년 전 수요집회를 나가기 전까진 내가 위안부였다는 걸 누가 알까봐 무서웠어요. 너무 부끄러운거야. 그래서 입을 꼭 다물고 있었지. 그런데 세상에 비밀은 없더라고요.”

길 할머니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과거의 기억을 ‘비밀’이라는 공간에서 끄집어 낸 계기는 ‘혼잣말’이었다. “어느날 TV를 보고 있는데 황금주 할머니가 나와 울면서 위안부 피해자였다고, 일본은 정말 나쁘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자기 얼굴에 침 뱉는건데 내가 다 창피했죠. ‘나는 도저히 말 못하는데…’라고 중얼거렸더니 옆에 있던 며느리가 눈치를 챈거예요.

그날 밤 아들ㆍ며느리와 함께 밤새 울었죠. 내가 위안부였다고….” 길 할머니가 60여년동안 가슴에 묻고 산 쓰라린 아픔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껏 족쇄였던 과거를 드러냄으로써 편안함을 찾은 순간이었다고 한다.

‘당시를 회고해달라’, 상처에 소금을 뿌려 짓이기는 것과 같은 잔인함,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할머니, 그때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으세요, 죄송해요, 힘드시면 말씀 안하셔도 돼요.”

길 할머니는 “이제는 내가 당했던 일들을 세상에 더 많이 알리려고 해. 절대 창피한게 아니고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거든, 되려 일본이 부끄러워해야 할 짓이지요, 마음이 항상 무거웠는데 이야기를 하고 나니까 오히려 더 편안해지더라고요”라며 그때를 되짚어갔다.

“13살인가 14살인가 몇 살이었는지 잘 기억도 안나요, 철이 없었지, 돈 벌 수 있게 해준다고 해서 누군가를 따라갔는데 다다미 한장 달랑 깔린 방에 놓고 가는거예요, 일본 군인들이 한 명씩 들어와서 못된 짓을 했는데 울고 또 울고 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나쁜 성병을 얻게 돼 집에 가라고 했는데 조금 나으니까 또 어떤 사람들이 와서 어디론가 끌고 가는거예요, 계속 그랬어 일본 군인들이, 몇 년이 흘러서 또 병을 얻은거지, 의사가 자궁을 들어냈는데 죽을 것 같았어요, 배 수술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말도 못해, 너무 너무 괴로웠지요.” 길 할머니는 애써 무덤덤하려 했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8ㆍ15 해방 후 길 할머니는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나이 18세. “해방이 되고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왔지요, 그때 나한텐 30원인가 있었고 배에서 내리니까 주먹밥 하나 주더라고요. 내가 고향이 평양인데 그땐 평양을 오갈 수 있었거든, 그런데 차마 집으로 가지 못했어요, 너무 남루했지, 씻지 못해서 냄새도 나고…, 어떤 사람이 옷과 먹을 것을 준다고 해서 따라갔어요, 돈 벌어서 빨리 평양에 가고 싶었거든요, 그땐 내 음성이 고왔어요, 그래서 그 사람 가게에서 노래품을 팔면서 지내게 됐지요. 그러는 동안 38선이 그어졌고….”

길 할머니는 서른한살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 생긴 것이다. 사람의 인연은 하늘이 내린다더니 한 아기로 인해 길 할머니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됐다. “병원에 봉사를 하러 갔는데 한 여자가 아기를 낳고 바로 없어졌어요, 그냥 두고 간거지요, 함께 봉사를 갔던 사람들이 나보고 키우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내 앞길도 못찾는다’고 했더니 ‘닥치면 모든 하게 돼 있다’고 해서 다음 날 아기를 데려다 키우게 됐어요, 잔병치레가 심해 ‘내가 잘못해서 아이가 아픈가’하고 걱정이 됐지만 지금은 아주 잘 커서 효자예요.”

핏줄 하나 없던 길 할머니는 ‘가정’이 생긴 뒤 더 지독하게 일했다고 한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덕분에 판피린과 박카스가 길 할머니의 만병통치약이 됐다. 만물상, 기성복 가게, 속옷 가게, 옥수수 삶은 좌판, 번데기 장사까지 안해본 것이 없다. 그 밑천으로 현재 대(大)가족을 만들었다. “아들을 대학교 대학원까지 보내 지금은 인천에서 목사를 하고 있어요, 며느리도 얼마나 알뜰한데요, 대학교 2,3학년인 손주가 있고 초등학교 6학년인 입양한 딸이 하나 있죠, 다들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길 할머니가 남한에서는 자식 농사 ‘풍년’을 이뤘지만 북한의 가족은 가슴 깊숙이 묻어야 했다. 부모ㆍ형제를 마지막으로 본지 70여년이 흘렀다. 떠올리고 싶은데 기억이 흐릿해져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당신이 살던 평양시 서성리 76번지와 아부지, 엄마, 큰 오라버니, 둘째 오라버니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길창봉, 어머니는 김두칠, 그리고 두 오라버니는 길원세, 길원도였어요, 그런데 나보다 네살 많았던 언니와 남동생 이름은 기억이 안나요, 하긴, 어제 일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때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어요.”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해봤지만 생사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길 할머니는 2000년대 초 정대협에서 마련한 행사로 금강산을 가게 됐을때 애타게 ‘길씨 성(姓)’을 찾아다녔다. 어쩌면 헤어진 가족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북한 출입국 관계자에게 길씨 성을 가진 사람이 없냐고 몰래 물어봤지요, 내 성이 희귀성이잖아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주위에 길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거예요, 내가 꼭 좀 찾아달라고 애원해죠, 길씨 성이라면 어쩌면….” 이야기는 계속됐다.

“사흘 후 집에 갈 때가 됐는데 그 사람(출입국 관계자)한테 연락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못찾았나보다 생각하고 남한으로 건너오는 통과대를 지나왔죠, 그런데 뒤에서 그 사람이 ‘길원옥’이라고 큰 소리로 부르는거예요, 나는 뒤돌아보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그땐 북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몇 번씩 주의를 받았거든요, 함께 동행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며칠씩 발이 묶이면 어쩌나 걱정이 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용기 내서 ‘길씨 성이 있었나요’라고 물어보면 됐을 것을,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무슨 이야기였을까 궁금해 잠이 안와요.”

길 할머니가 나눔 쉼터에 온 것은 4년 전이다. 혼자 장사하면서 살다가 일본군 만행을 적극적으로 알리게 되면서 이곳에 터를 잡게 됐다. “할머니들과 함께 있으니까 외롭지도 않고 아주 좋아요, 여기가 천국이지요, 일주일에 한 두번씩 선생님들이 오셔서 미술ㆍ음악도 가르켜주고 종이접기도 같이 하는데 나는 절대로 꽤를 안피워요, 그동안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잖아요, 그래서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몰라요, 뒤쳐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따라가고 있어요.”

길 할머니는 2004년 10월 국회 외교통상부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참석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를 받고 싶으니 제발 도와달라”고 눈물로 호소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할머니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게 했다. 또 2005년 6월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ILO 총회에서 ‘일본군위안부는 성노예제다. 이는 29호 강제노동금지협약을 위반한 것이므로 일본이 보상책을 마련할 것을 희망한다’는 결정을 이끌어 내는데 큰 힘이 됐다.

2007년 11월엔 유럽 순방활동을 통해 네덜란드와 유럽연합(EU) 회의에서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하는 데도 중심 역할을 했다. 길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과 진상 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 작지 않은 결실을 거뒀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단다. “정작 일본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사죄를 하지 않고 있으니…, 모든 나라에서 우리를 위한들 무엇이 소용있겠어요, 결국 일본이 풀어야죠.”

일본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끈질기게 요구해 온 할머니들이 이제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가고 있다. 지난해에만 해도 15명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함께 집회를 했던 할머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 한번 본적 없는 할머니들이 떠났다는 말을 들으면 내 몸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예요, 내가 (하늘로) 가는 것 같아 힘이 쭉 빠져요,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일본이 사죄를 해야 해요, 원한이 풀어지면 생명도 연장될꺼요, 내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수요집회에 나갈겁니다.”

수요집회가 있는 날이면 길 할머니는 오후 내내 자리에 누워야 한다. 기력이 달려서다. 여름철엔 뜨거운 태양 아래 차양막 하나 없이 구호를 외쳐야 했고, 겨울철엔 얼음장 같은 손을 응원도구 삼아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150cm 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체구에 기운이 남아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다. 09년 1월 7일, 한 시간 동안 여든 두살 노인이 추위에 벌벌 떨며 일본 정부를 향해 사죄하라고 호소했지만 어느 한명 내다보지 않았다. 굳게 닫힌 정문과 펄럭이는 일장기만이 수십 년 이들을 봐왔을 뿐이다.

글.사진=이지은 기자

[“17년 전 첫 집회때 입은 코트입니다”]

1992년 1월 8일 첫 집회 참가자였던 당시 정대협 서기 김혜원(75) 할머니가 17년 전에 입었던 푸른색 코트를 입고 7일 제847차 수요집회에 등장했다. 김 할머니는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 소회를 밝혔다. “제가 17년 전 첫 집회를 시작했을 때 입었던 코트를 오늘 입고 나왔습니다, 제 얼굴은 쪼끌쪼글해졌습니다, 그만큼 시간이 흐른 것이죠, 그런데 이 옷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과 함께 또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것은 바로 내 심장입니다. 일본이 반성을 하고 사죄를 할 때까지 이 심장은 계속 뛸 것이고 이 옷 또한 낡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인을 대표해 할머니들께 죄송합니다”]

일본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오노 마사미(60)씨가 7일 집회에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 강제동원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사과도 배상도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인을 대표해 할머니들에게 죄송한 마음뿐이다”라고 일본어로 사죄한 뒤 일본 대사관을 향해 “할머니들에게 공식 사죄하라”라고 외쳤다. 그는 “할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수업은 동료에게 맡기고 달려왔다”며 “일본이 반성하는 그날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하겠다”고 말했다.


[숫자로 보는 수요집회]

△4: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지난 4년동안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정서 안정 및 심리 치유를 위해 원예, 미술, 노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할머니들은 지난해 한해동안 정성스레 만든 작품 50여 점을 나눔 쉼터의 거실과 벽면을 채워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5:일본정부의 사죄와 반성을 기다리다 2008년 하늘로 올라가신 할머니들

△17:1992년 1월 8일부터 할머니들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가 열렸고 올해로 만 17년째를 맞았다.

△54:2007년 12월 유럽연합의 유럽의회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의 위안부 강제동원과 관련해 일본 정부의 공식 시인과 사과, 보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럽의회는 ‘위안부를 위한 정의’를 표결에 부쳐 출석의원 57명 중 54명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92: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중 최고령인 이순옥 할머니

△94: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중 현재 생존해 계신 할머니들

△234: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847:지난 7일 열린 ‘수요집회’ 횟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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