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터뷰>러시아 문학게 동포작가 아나톨리 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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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러시아의 한인 작가 아나톨리 김(57)이 톨스토이 재단이 창간한 러시아 최대 문학지'야스나야 폴랴나'의 초대 편집국장에 선임돼 러시아 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소수민족 출신 중에서 유일하게 러시아문학의 전통을 이어갈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고 있는 그는 지난달 30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만난 기자에게“올해로 강제이주 60주년을 맞는 러시아 한인들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공백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러시아 문학계가 야스나야 폴랴나의 출현으로 새로운 가닥을 잡아가는듯 하다.창간 동기는.“야스나야 폴랴나는 문호 톨스토이가 태어난 곳이지만 러시아인들에겐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없다.이곳은 지난 세기 진보와 자유를 갈망하던 러시아 지식인들의 정신적 메카로,이들은 사회적 위기를 극복해나갈 해답을 톨스토이즘에서 구하곤 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가치관의 혼란으로 과거와 비슷한 정신적 위기를 맞게 됐다.이런 상황아래 문학에서 정신적 자생력을 찾으려는 운동이 최근들어 문인들을 중심으로 거세게 일고 있고 기업인들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야스나야 폴랴나의 창간에는 톨스토이 재단이 주축이 됐지만 기업메세나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달리 말해 야스나야 폴랴나는 현재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고 있는 애국심의 표현이며'문학을 통한 구국운동'의 첫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출신 작가도 많은데 왜 하필 한인인 당신을 선임했다고 생각하는가.“나는 한인이지만 러시아어로 작품을 쓰는 러시아 작가다.또한 내 소설들은 가장 러시아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러시아적이라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적이라는 의미다.서구 문학과 달리 러시아 문학은 늘 인간존재와 그 내면세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대표적 작가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다.나는 이들의 연장선상에서 인간을 소우주로 다루는 러시아적 문학전통에 충실한 작가다.” -당신이 순수 러시아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에는 한국적 색채가 짙다.대표소설'다람쥐'의 저변을 이루는 것도 다름아닌 불가사상이 아닌가.“내게 무의식중에 동양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다람쥐''연꽃''아버지의 숲'등 내 소설 속에는 대부분 자연친화사상과 생명존중 사상이 투영돼 있다.다람쥐로 환생한 인간의 전생이야기를 소재로 한'다람쥐'에서는 인간계와 동식물계 사이의 두꺼운 벽을 없애버림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랜 오만과 편견을 헐어보고 싶었다.이러한 나의 문학적 시도가 80년대초만 해도 정부 당국자들의 눈에는 상당히 위험한 것으로 비쳐진게 사실이다.왜냐하면 나의 작품들은 근본적으로 폭력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폭력과 인간 불화의 근원이 자의식과 이성이라는 나의 믿음은 동양적 사고방식에 가깝다.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인간이 자의식을 벗어버리고 도시적 합리성을 버릴 때만 갈등과 알력에서 벗어나 평화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다.이러한 나의 문학관은 인간이성과 합리성에 토대를 둔 공산주의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내가 반체제작가들보다 더 위험시됐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올해는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60주년이 되는 해다.인류역사상 유례없는 혹독한 탄압을 겪어야 했던 45만 한인의 아픔을 펜으로 대신해줄 의사는 없는가.“얼마전 한인 강제이주를 주제로 한'갈대밭의 들고양이'를 완성해 서울의 한 방송국에 주었다.나는 러시아의 한인 이민 3세대로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나의 부모만해도 스탈린의 한인 탄압의 희생자다.'갈대밭의 고양이'는 비록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짐짝같이 내팽개쳐졌지만 모진 시련을 딛고 억새풀같이 일어선 한민족의 끈기와 강인함을 형상화한 것이다.” -당신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정반대 계열의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당신의 급속한 부상은 그간 러시아 문단을 이끌어온 솔제니친 진영에 타격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던데.“솔제니친의 문학은 근본적으로 나와 다르다.그가 사실주의 문학을 이끌어왔다면 나는 러시아 문학의 또다른 축인 환상주의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솔제니친 문학은 메시지성이 강한 정치문학이다.그것은 폭로와 고발을 통한 정치적 투쟁을 근본목표로 하고 있다.그러나 러시아의'수용소 군도'시대는 이미 과거사가 돼버렸다.이런 점에서 미래의 러시아 문학은 정치성과 지나친 사실주의가 배제된 환상주의 문학이 지배할 것으로 전망된다.나의 작품세계를 보통 환상적 사실주의로 분류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러시아에만 국한된게 아니고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마르케스도 나와 같은 계열의 작가다.이미 세계가'정치 지배의 시대'를 마감하고 있다.” -당신은 90년대초를 한국에서 보냈다.언젠가 그때의 느낌을“모국의 젖가슴에 안겨 지낸”기분이라고 한 기억이 난다.다시 한국을 방문할 계획은.“나의 자전적 소설이 한국에서 출판될 예정이기 때문에 조만간 한국을 방문할 것같다.91~95년을 나는 한국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으며 그때의 만 5년간이 내 평생에서 가장 창작에 몰두한 시기였다는 사실이 놀랍다.모국이 주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이란….정말 피는 물보다 진한 모양이다.” 모스크바=최성애 문학전문기자

<사진설명>

톨스토이 재단이 발간한 러시아 최대 문학지'야스나야 폴랴나' 초대 편집국장에 선임된 한인 출신 러시아작가 아나톨리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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