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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꾼 한마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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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사내아이 네 명(우리 형제는 아들만 넷이고 나는 차남이다)과 종종 저녁식사를 같이하면서 식사가 끝난 후에도 한 시간 이상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다. 그때 동생 둘은 아직 어려서 아버지 말씀을 잘 이해 못한 탓인지 항상 중간에 자리를 떴고, 당시 수험생이던 형도 역시 도중에 자리를 비웠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씀을 끝까지 듣게 되는 아이는 늘 나 혼자뿐이었다. 당시 회사를 경영하던 아버지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 이야기와 회사 내에서 일어난 여러 인간관계를 주로 들려주셨는데 ‘이외지리(理外之理)’라는 말을 써서 말씀하셨다. 그 말은 아버지가 만든 사자성어였다.

이 말은 ‘세상에는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손해라고 여겨지는 일이 많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자신에게 큰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러니 손해를 두려워 말라’라는 뜻이다.

아버지의 인생관을 그대로 보여 주는 말이었다. 어머니가 자주 불평하실 만큼 아버지는 늘 회사와 직원들을 위해 자신의 급여까지도 할애했다. 또 아버지는 역경을 견뎌낸 경험이 나중에 인생에서 큰 밑거름이 된다고 자주 강조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밥상머리에서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여러 말씀에서 나는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물론 아버지 말고도 내 인생에 좋은 말씀을 선물해 주신 분이 많다. 중학교 때 교장선생님도 그런 분이셨다.

교장선생님은 월요일 아침마다 교정에 전교생들을 모아놓고 교훈이 될 만한 얘기를 예를 들어가며 말씀하셨는데 그중 하나가 “하나를 듣고 열을 아는 사람보다 하나를 듣고 열 가지 의문을 품는 사람이 돼라”였다. 그리고 나는 “하나를 듣고 열을 아는 천재는 못 될지라도 열 가지 의문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하기로 다짐했다. 그 뒤 그 말이 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것인지 나름대로 탐구심이 강한 사람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대학생이 돼 내 의문은 ‘왜 일본은 침략 국가가 되었는가’라는 방향으로 모였고, 그 문제를 풀겠다는 쪽으로 나의 탐구심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학에 입학할 때 아버지의 권유로 공학도가 되었지만 나는 원래 역사 공부를 좋아해 고등학교 시절 여러 역사 교재를 소설처럼 애독했다.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면서도 언젠가 내 전공이 바뀔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결국 몇 년 후 한국에 건너오면서 현실이 됐다.

내가 재학 중이던 1977년 무렵, 도쿄대는 창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 기념행사를 반대하는 학생이 의외로 많았다. 그 이유는 ‘도쿄대가 일본 근대사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에 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시아 침략의 선봉에 섰던 도쿄대’라는 포스터가 당시 캠퍼스 곳곳에 붙어 있었다. 나는 당시만 해도 내가 다니는 대학이 그처럼 나쁜 과거가 있는 줄 잘 몰랐다.

마침 그 무렵 어떤 잡지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일본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것들은 내가 품고 있던 의문과 탐구심을 자극해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한 이유를 연구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했다. 그들의 한마디가 계기가 돼 지금 한국 땅에 살고 있는 것이 나는 자랑스럽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일본학

<약력>도쿄대 공학부 졸업, 고려대 정치학 박사,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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