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패 연구] 가문의 영광 좇다 쪽박 찼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코노미스트실패는 반복된다. 실수나 과오는 쉽게 잊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갑자기 찾아온 경제 위기로 많은 기업이 위기에 직면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면 지난 행동부터 복기해 보자. 실수를 반복하고 있을지 모른다. 당분간 끝나지 않을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이코노미스트가 국내외 기업들의 실패 사례를 연재한다.

관련사진

2008년 12월 19일 자본·업무제휴 합의 기자회견장에서 악수하는 오쓰보 파나소닉 사장(왼쪽)과 사노 산요전기 사장.

지난 12월 말 일본을 대표하는 글로벌 전기전자 메이커 산요전기가 경쟁사인 파나소닉(옛 마쓰시타전기)의 자회사가 됐다. 1947년 창업 이래 일본의 전자입국을 이끌었던 산요전기의 영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한편, 파나소닉은 연 매출액 11조 엔 규모의 세계 제2위 전기전자 메이커로 우뚝 설 전망이다.

산요전기는 왜 파나소닉에 먹혔나 #세습경영 고집하다 망해…시대에 뒤떨어진 전략이 화근

마쓰시타(松下)전기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와 산요(三洋)전기의 창업자 이우에 도시오(井植歲男)는 한때 처남매제간으로 일본의 경제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사이 좋게 담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1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 두 회사의 운명은 엇갈렸다.

산요는 현재 휴대폰과 노트북 등 모바일 제품부터 하이브리드자동차(HEV)와 전기자동차(EV)에까지 두루 사용되는 충전지 시장에서 세계 1위의 점유율(산요전기 20.6%, 파나소닉 5.9%)을 차지하고 있으며 태양광 전지시장에서도 업계 최고의 기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왜 파나소닉은 비상하고 산요는 추락하는가. 산요 추락의 배경에는 경영진의 치명적 실수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산요전기 경영 파탄의 장본인으로 꼽히는 것이 창업자의 장남 이우에 사토시다. 그동안 산요전기는 이른바 ‘산요상점’이라는 세론의 비웃음을 사왔다. 산요상점이란 말은 산요전기와 창업자 가문인 이우에가(井植家)의 밀접한 비즈니스 관계를 비꼰 데서 나온 말이다.

사장 이우에 사토시 개인 소유 기업이 장기간에 걸쳐 산요전기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겨왔던 것이다. 이우에가의 개인 소유 회사인 썬푸드시스템은 일본 전역에 퍼진 산요전기 사업장의 급식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매출 총액이 15억 엔이었다. 법대로라면 특정 기업과 회사 임원 혹은 근친자의 비즈니스 거래는 일본의 증권거래법상 ‘관련 당사자 거래’로 간주돼 유가증권보고서에 명확히 기재해야 한다.

이는 투자가의 입장에서 경영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 경영 정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요전기는 그간 모르쇠로 일관해 왔다. 산요전기가 소유한 4만2900㎡ 규모의 영빈관(望淡閣)만 해도 그렇다. 1969년 이래 창업자의 상속 재산으로 사토시의 개인 소유 건물이었으나 2003년 산요전기의 자회사 산요에스테토가 사들인 후 2005년 다시 산요전기가 이를 매입했다.

이 영빈관의 이용 횟수는 1년에 한두 번뿐으로 산요전기에 꼭 필요한 부동산이었느냐는 비판도 많았다. 사토시 개인의 영달을 위해 회사에 비용을 전가했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즉 창업자 일족이 지배하는 패밀리 기업군과 상장법인 산요전기의 공사혼동의 불투명한 거래관계는 오늘날 산요 쇠락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더해 창업자 가문의 아집은 시대착오적인 경영정책을 낳았다. 2002년 3월 결산에서 일본의 전기전자 9사 가운데 6사는 IT버블 붕괴에 따라 대규모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산요전기는 샤프, 소니와 함께 당기 흑자를 기록하면서 ‘승자 3S’의 우량기업으로 분류됐다.

당시 사장이던 이우에 사토시는 1986년 사장 취임과 함께 ‘제조업 이외 사업 부문에서 매출액의 3분의 2를 달성한다’는 경영목표를 세우고 소비자 할부금융, 액정패널, 반도체, 디지털카메라, 휴대폰 등 적극적인 사업 다각화를 전개했다. 사토시는 산요크래디트㈜ 경영에 성공하면서 ‘오사카의 GE’ 혹은 ‘오사카의 잭 웰치’란 별명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작은 성공이 큰 실패를 불러오게 된다. 사토시는 자신이 여러 가지를 다 할 수 있다고 믿게 된 듯싶다. 2000년대 산요전기는 반도체, 액정, 휴대폰 등 각각의 사업 부문에 1000억 엔이 넘는 투자를 하는 방만경영으로 일관했다. 즉,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철 지난 경영 패러다임과 시대착오적인 경영전략으로 글로벌 기업 산요전기의 경영활로를 모색했던 것이다.

관련사진

photo

결과는 참담했다. 당시 산요의 주력사업이었던 가전사업은 1990년대 대형 양판점의 난립과 저가격 경쟁에 휘말리게 됐다. 이때 산요의 경영진이 선택한 것이 저가 대량생산 정책.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산요제품=싸구려’라는 브랜드 이미지의 실추로 이어졌다.

산요전기는 2002년 이후 막대한 자원을 투입한 반도체 사업과 액정패널 사업은 물론이고, OEM생산이 중심이었던 휴대폰 사업도 IT버블의 붕괴와 함께 대규모 영업적자에 시달리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2004년 니가타현 대지진으로 반도체 주력공장이 무너지는 사고까지 발생하게 되자 산요는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게 된다. 만약 산요전기가 그들처럼 핵심사업인 충전지와 태양전지 그리고 전자부품 사업에 경영자원을 집중 투입하는 한편, 종래 본업이었던 가전을 전면 철수·매각하는 과감한 구조개혁을 전개했더라면 지금의 굴욕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작은 성공에 취했다가 큰 실패

관련사진

photo

물론 사토시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2004년 말 발생한 니가타현 대지진으로 산요의 주력 반도체 공장이 심각하게 파손됐을 당시로 돌아가보자.

당시 1700억 엔이 넘는 적자가 드러나자 그 책임으로 73세의 이우에 사토시는 최고 경영고문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자마자 사토시는 바로 장남 이우에 도시히코를 사장에 앉히는 인사를 강행했다.

세습경영이라는 따가운 세론을 의식해서인지 그 바람막이로 53세의 저널리스트 출신 노나카 도모요(野中ともよ)를 신임 회장으로 영입하는 터무니없는 인사도 단행했다.

사토시가 결국 산요의 영광이 아닌 가문의 영광을 더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정황이다. 그 후 이우에가의 경영진은 2006년 3000억 엔의 자본 수혈과 우선주(보통주로 환산, 지분율 약 70%) 인수를 통해 새로운 대주주로 등장한 골드먼삭스(32.8%)와 다이와(大和)증권SMBC(32.8%), 미쓰이스미토모은행(1.3%)과 기업재건을 비롯한 경영정책 전반에 걸쳐 크게 대립하게 된다.

금융 3사는 2006년 3월 빈발하는 제품 사고와 장기간에 걸친 분식회계 의혹이 제기되자 이우에 도시히코 사장을 비롯한 이우에가 가신단의 경영권을 전부 박탈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인해 투자자금의 회수를 서두르게 된 골드먼삭스를 비롯한 금융 3사는 산요전기의 자체 회생을 단념했다. 족벌경영을 고집하다 회사마저 빼앗긴 꼴이 된 것이다.

한편 산요와 함께 시장의 거인으로 돌아온 파나소닉은 어땠는가. 그들은 1990년대 불황을 겪으며 과감한 구조개혁(2008년 파나소닉으로 사명변경과 내쇼날 브랜드의 폐기)으로 경쟁력을 회복했다.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고노스케 회장의 유지는 받들되, 가문의 잇속을 챙기는 데 회사를 이용하지는 않았다. 물론, 가문의 영광을 위해 방만한 경영도 하지 않았다. 결국 가문의 영광을 버렸던 파나소닉이 산요전기의 새로운 주인이 됐다.

정안기·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joungak@naver.com

[J-HOT]

▶"일본인이지만 한국서 사는 게 자랑스럽다"

▶'넘버2' 외치는데도…강호동이 빛나는 이유

▶ 30년 전문가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 42살 강수진, 2세없이 터키인 남편과 사는 이야기

▶메뚜기떼 같은 전투기가…이스라엘 '초정밀 공습'

▶ 아이비 "인간취급 받지 못하면서 가수하고 싶지 않다"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