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살 강수진, 2세 없이 터키남편과 사는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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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 무대 위에서 강수진보다 아름다운 존재는 없다.“ 춤을 추지 않으면 영혼이 아프다”며 하루에 열두 시간씩 토슈즈를 신는 여자. ‘세계적’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발레리나 강수진을 향한 환호는 가족의 헌신적인 사랑 위에 놓인 덕에 더욱 빛난다.

언제부터인가 강수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그녀의 유려한 몸짓보다는 마치 고행을 거듭한 순례자처럼 거친 그녀의 발을 먼저 떠올린다. 한때 인터넷을 달군 상처투성이의 울퉁불퉁한 발 사진, 프로필과 수상내역을 줄줄 외지 않아도 그 뭉클한 사진 한 컷이면 그녀가 어떻게 세계 제일의 자리에 올랐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못생긴’발의 의미는 뭘까. 발레리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꼿꼿한 일직선 동작을 취하 기 위해서는 토슈즈 안에 덧댄 나뭇조각의 도움이 필요하다. 몸을 우아하게 날렸다가 사뿐 히 무대에 내려앉을 때 관객은 탄성을 지르지만, 사실 발레리나는 토슈즈 속 나뭇조각에 발이 짓이겨지는 고통을 견뎌야 한다. 거듭되는 동작에 상처가 파이고 피가 흐르면 슈즈 안에서 살과 엉겨붙어 공연이 끝날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

강수진은 남들이 4~5일씩 신는 토슈즈를 하루에 서너 켤레씩 갈아 신을 만큼 연습에 몰두하며 치열하게 무대에 섰다. 어릴 때는 발이 너무 아파 발가락 사이에 쇠고기를 끼우고 연습한 날도 있었다. 쇠고기 육즙과 상처의 핏물이 토슈즈에 얼룩질수록 그녀는 더욱 아파했지만 고통을 감내하며 묵묵히 춤을 춰 결국 발레리나‘명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 세계 제일의 발레리나를 만든 노력
그 노력을 가능하게 해준 헌신적인 가족

강수진의 일상은 마치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한 시계 같다.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명상과 요가,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8시에 발레단으로 향한다. 극장에서 무용을 시작하는 시간은 10시 이후지만 무용수들이 출근하는 어수선함 속에서 연습하는게 싫어 새벽부터 집을 나선다. 공연이 없을 때는 하루에 8~9시간, 공연을 앞두고 있을 때는 12시간씩 토슈즈 위에 몸을 세운다.

벌써 25년째 무대에 섰으니 이제는 맹렬한 연습에서 한발 물러나 조금은 수더분하게 하루를 보낼 법도 하련만 그녀의 일과는 변함이 없다. 지난 11월 17일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로미오와 줄리엣’도 수개월간의 치열한 연습을 거쳐 무대에 올린 대형 작품이다. 그렇다면 소문난 연습벌레인 그녀의 무대 뒤 일상은 어떨까. 공연을 앞두고 기자와 만난 강수진은 자신의 이름 앞에 놓인‘세계적’이라는 수식어가 가족 덕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든든한 파트너인 남편 말이다. “어떻게 보면 저는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성품도 따뜻하고 제 생활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는 남자랑 함께 사니까요. 발레를 할때도 그렇지만 가정에서도 저는 정말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아요.”그녀의 남편 툰치 소크맨은 터키 출신으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강수진과 함께 활동하던 동료이자 선배다. 두 사람은 15년 동안 우정을 나누다 지난 2002년 결혼 했다. 결혼 후 남편은 아내의 매니저 일을 자처 했다. 지금도 강수진의 모든 스케줄은 남편이 관리한다.

물론 남편으로서도 일등 신랑감이다. 아내가 발레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매일 손수 저녁을 준비하는 남자, 자신의 아내에게 “매니저가 보는 수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가고, 남편이 보는 수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할 줄 아는 로맨틱 가이다. 강수진은 이런 남편과의 일상이 참 편안하고행복하다.

“동료 같고 한편으로는 친구 같은 남편이어서 일상이 참 즐거워요. 무용수 출신이니까 저를 잘 이해해 주기도 하죠. 발레에만 신경 쓰라고 모든 일을 꼼꼼하게 관리해 주지만 제가 집에 있을 때는 발레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아요. 집에서는 푹 쉬라고 제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거죠.”

결혼 6년째에 접어들면서 2세 계획을 궁금해 하는 사람도 많다. 독일 정부로부터‘예술 장인’으로 공인받은 유명 발레리나와 무용수 출신 남편의 만남이어서인지, 벌써부터 두 사람 의 아이가 뛰어난 예술 감각을 지녔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결혼 초기에는 2세를 가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한때 그것으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어요.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지금은 부담감에서 벗어났어요. 언젠가 때가 되고 기회가 생기면 아이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할 수 없죠. 그러면 강아지랑 고양이랑 행복하게 사는 수밖에요.”(웃음) 남편을 향한 마음이 든든한 고마움이라면 또 다른 가족인 부모님을 향한 그녀의 마음은 애틋한 미안함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날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부모님 얘기를 할 때는 잠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공부하겠다는 딸을 위해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은 부모, 딸을 외국에 보내 놓고 노심초사했을 그 시절 부모 마음을 생각해보니 이제야 딸로서는 불효녀였다는 생각이 든다. 강수진은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고독한 싸움을 벌이다 몸이 아프거나 불편할 때도 한국에 전화해 부모님께 응석을 부려 본 적이 없다. 부모님이 걱정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부모님에게 좀 더 살갑게 대하고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많이 얘기하는게 더 좋았을 거라는 후회가 밀려온다.

부모님을 남겨 두고 혼자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며 가졌던 미안한 마음을 아직 다 털어 내 지 못한 그녀다. 국내 공연을 앞두고 기자회견 자리를 마련한 강수진은“은퇴 전에 한국에서 큰 공연을 꼭 해보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 라고 말했다. 남들이 보기엔‘아직 앳된 얼굴의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무슨 은퇴냐’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나이로 마흔을 넘기면서부터 조금씩 자신의 나이와 무용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마흔둘의 원숙한 무용수 나이가 들수록 발레가 새롭다

“내 나이 서른 때는 마흔을 넘겨서도 춤출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실제로 요즘은 가끔 발레를 그만둔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요. 물론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요. 하지만 지금은 은퇴를 고려할 시기는 아닌 것 같아요. 여전히 발레가 재밌고 즐겁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오십 넘겨도 계속 무대에 설 수 있을 것 같아요.”그녀는“내 나이와 상관없이 다양한 인생을 살아 볼 수 있어 무용수의 삶이 매력적이다”라고 말한다.

일단 무대에 올라서면 생물학적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역할과 연기에 몰두하면 현실과 다른 세계, 다른 나이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마흔둘의 발레리나 강수진이지만 막이 열리면 열여섯 처녀 줄리엣이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강수진에게는 은퇴 후의 삶이나 진로보다‘무대 위 3 시간 동안 관객들에게 뭘 해줄까’고민하는 게 더 중요한 문제다. 물론 힘과 기량이 다해 무대에서 춤추지 못하고 걷기만 할 때가 온다면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겠지만 그녀는 아직 전성기다. “ 물론 은퇴에 대한 큰 계획은 있어요.

아마 무대에 서지 않아도 발레를 떠나지는 않고 후배를 키우겠죠. 하지만 아직은 액티브 하게 활동하는게 더 좋아요. 그게 나한테 더 즐거운 길이고, 내가 사랑하는 길이니까요. 스무살 발레리나 시절에 할 수 없었던 연기를 베테랑 발레리나가 되어 소화할 수 있게 된 점 도 있고요.” 아무래도 체력은 나이에 비례한다.

하지만 오랜 기간 쌓은 연륜,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똑같은 두께로 내려앉은 세상 경험은 무용수에겐 또 다른 자산일 수 있다. 못생긴 발을 보여주기 싫어 한여름에도 꽁꽁 싸매고 다니던 처녀 강수진과, 남들 시선을 개의치 않고 여름에는 시원한 샌들을 신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강수진, 독불장군처럼 혼자 연습만 하던 젊은 발레리나와, 눈빛만 봐도 마음이 동하는 사랑을 경험해 본 원숙한 발레리나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훨씬 넓다. 파워풀한 몸짓이 예년보다 약해졌을지 몰라도 표현력은 그만큼 향기가 깊어졌다.

이에 대해 그녀 자신은“나이를 먹을수록 발레가 새로워진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 자녀가 대학생이 돼서도 그녀의 공연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를 가장 빛나게 하는 곳은 무대다. 하지만 그녀가 발산하는 빛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하루아침에 얻은 결과물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빛나기 위해 25년 동안 쉼 없이 피땀 흘리며 스스로 채찍질했고, 그 기간 동안 가족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어 가능한 결과였다. 조명 켜진 무대 위의 발레리나 강수진이 세상 누구보다 화려하듯, 무대 밖 일상에서 일어나는 그녀와 가족의 삶도 그만큼 아름답게 빛을 발한다.

취재_이한 기자, 사진_임효진(studio l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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