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에세이] ‘방학은 세상 배우는 시간’ 숙제 없는 프랑스 중·고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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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파리 쥘 페리 고등학교에 다니는 쥘리에트 시몽(16·여)은 22일 벨기에로 여행을 떠났다. 부모님이 시몽의 겨울 방학을 맞아 준비한 여행이다. 시몽은 “아버지 친구 집에 머물면서 특산물인 맥주 소스로 요리한 토끼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을 것”이라며 즐거워했다.

딜랑 부르주아(15)는 중학교 3학년생이다. 방학에 온 가족이 기차를 타고 남프랑스의 마르세유로 떠난다. 할머니가 계신 곳이다. 겨울 방학에는 언제나 마르세유로 가서 할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먹는 게 그의 큰 즐거움이다. 바닷가 산책도 하고 친척들과 오랜만에 만나 실컷 놀 계획이다.

지난 주말 프랑스 중·고등학교의 방학이 시작됐다. 프랑스 학생들은 방학에 뭘 하고 지내는지 중·고생 15명에게 직접 물어봤다. 겨울 방학 내내 학원 수강을 하면서 밤 늦도록 교과서와 문제집에 파묻혀 지내는 한국 중·고생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취재에 응한 프랑스 학생들은 대부분(10명) 친척집 방문 또는 가족 여행을 한다고 답했다. 다양한 독서나 피아노·농구 등 취미 생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겠다는 학생도 있었다. 밀린 공부를 하거나 학원 수강을 한다는 학생은 두 명에 불과했다. 둘 모두 외국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프랑스의 방학은 말 그대로 공부를 잠시 놓고 다른 일을 찾는 시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많은 걸 얻는다는 게 프랑스 교사들의 설명이다. 프랑스의 수업 자체가 암기식 교육보다는 현장과 자율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망딘 뒤랑(14·여)은 부모님과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얼마 전 학교 역사 시간에 베트남을 배웠다. 부모님이 이곳을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다. 베트남은 프랑스 현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뒤랑은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베트남의 역사·지리·문화 등에 대한 공부를 추가로 했다고 한다.

고1인 안 마리 로랑의 경우 역사와 피아노가 이번 방학의 주제다. 학교에서 배우는 세계사는 줄거리 중심이지만, 그는 유럽의 역사를 인물 중심으로 정리해볼 계획이다. 평소 늘지 않던 피아노 실력을 키우기 위해 구청에서 저렴하게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에도 등록했다.

학원 수강과 밀린 공부를 하겠다는 학생은 러시아에서 유학 온 미하일 미르초에프와 대만에서 온 크리스틴 첸 정도였다.

프랑스 중·고생이 방학을 맞아 잠시 교과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우리와 완전히 다른 교육 시스템 덕분이다. 학교는 방학 중에 과제를 내주지 않는다. 있다고 해도 개학 후에 발표할 주제 등을 내주는 정도다.

말라르메 중학교의 프레데릭 위장(사회과) 선생님은 “학생들이 하루에 절반을 학교에서 보내기 때문에 방학은 가족들과 식사하고 대화하도록 배려하는 시간이다. 무리한 과제나 공부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보다 경쟁이 덜 한 사회 분위기도 학생들의 어깨를 가볍게 한다. 위장 선생님 학급의 경우 절반 이상이 실업계나 예능학교를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중학교 때부터 대학 진학에만 몰두하지만 프랑스는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사회에 뛰어드는 걸 전혀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다.

그래도 사회에서 열심히 일해 자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제대로 대접받는 문화가 정착돼 있기 때문이다. 고교 역시 고등교육기관인 그랑제콜 진학을 원하는 상위 5% 안팎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공부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한국의 수능에 해당하는 바칼로레아에만 합격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바칼로레아의 평균 합격률은 80%에 달한다. 위장은 “바칼로레아의 경우 논술 능력이 당락을 좌우하기 때문에 중학교 때부터 방학 중에는 여행과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많이 권장하는 편”이라고 강조했다.

프랑스에도 최근 조기 유학 등으로 온 한국·일본·대만 학생 비율이 높아졌다. 대부분 공부를 잘한다. 파리의 한 고교 철학 교사는 “한국에서 온 아이들은 하나같이 학급에서 상위권”이라고 했다. 머리도 좋고 학구열도 높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는 “파리에 와서도 프랑스 학교 수업을 받은 후 과외나 학원 수업을 받는다”며 “열심히 공부하는 게 나쁘지는 않지만 문제는 모든 학생이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아이들은 자면서 키가 크듯이 공부에서 잠시 손을 놓는 방학 중에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우리 교육 현실이 바뀔 수는 없겠지만 우리 사회를 위해서나 학생 개인의 인생을 위해 어떤 교육 시스템이 필요한지 모두가 생각해볼 대목이다.

전진배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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