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업종서 탄생한 최고 하이테크 기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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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내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 전경.

뉴스위크박태준 포항제철(이하 포스코) 초대 사장이 39명의 직원과 함께 일관제철소 건설 대장정에 나선 때는 1968년 4월. 그로부터 5년 뒤인 1973년 7월 포스코는 국내 최초로 103만 톤 조강능력을 갖춘 고로(용광로)를 가동했다.

서울엔지니어링, 포스코와 더불어 걸어온 35년… 풍구 기술 자립에 이어 세계시장 점유율도 1위

이 무렵 포스코와 동갑내기였던 서울엔지니어링㈜(당시 서울알루미늄공업사, 1968년 11월 창업)의 오세철(75) 사장은 포스코로부터 회사의 운명을 가름할 중대한 사업 제안을 받았다.

포스코가 그때까지 전량 수입에 의존해오던 풍구(風口)를 국산화해달라는 요구를 해온 것이다. “채산성을 따져볼 겨를도 없이 일단 승낙하고 뛰어들었다”고 오 사장은 당시를 회상했다.

풍구란 외부에서 데워진 섭씨 1200도 이상의 뜨거운 공기를 고로에 불어넣는 연결장치다. 하나의 고로에 30~40여 개의 풍구가 필요하다. 풍구는 금, 은 다음으로 열전도율이 좋은 동으로 만들지만 용융점이 섭씨 1083도에 불과하다.

풍구와 접촉하는 고로 내부의 온도는 섭씨 1400도를 웃돈다. 따라서 풍구 내부에 냉각수를 끊임없이 돌려 풍구 표면의 뜨거운 열을 식히도록 설계돼 있다. 풍구 불량으로 냉각수가 새나오거나 표면에 물방울이 맺히면 철강 제품에 하자가 생길 뿐만 아니라 쇳물에 물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폭발사고를 부를 수도 있다.

냉각수가 새나오는 풍구는 곧바로 교체되는데 이때 고로 송풍작업이 1시간 넘게 중단된다. 그 손실비용이 줄잡아 1억원에 이른다. 그래서 최고 성능이 입증된 풍구가 아닐 바에는 제철소 근처에 얼씬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엔지니어링은 본래 알루미늄 제조를 주업으로 하는 비철금속업체로 출발했다.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나온 오 사장은 포스코의 제안에 호응해 1975년부터 일본 업체에 로열티를 지급하면서 풍구 제조 기술을 배웠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3년 뒤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정작 가시밭길은 이때부터였다. 포스코에 시제품을 납품했지만 엄격한 품질 테스트 과정을 거쳐야 했다.

고로에 들어가는 43개 풍구 중 열을 가장 덜 받는 자리에 시제품을 하나 써봤는데 조금만 이상이 감지돼도 퇴짜를 당하기 일쑤였다. 개발에 착수하고 8년 동안 연간 공급량은 30개 남짓 됐다. 오랜 기간 막대한 개발비를 감당 못해 1984년 회사는 결국 부도를 맞았다(이후 1996년까지 10년 이상을 법정관리에 놓였다).

이 와중에도 이 회사는 기술개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포스코도 시제품 테스트에서 수명과 품질이 수입제품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판단되면 사용량을 조금씩 늘려줬다. 살얼음판을 걸은 끝에 1988년 포항제철소 고로 전체에 100% 국산 풍구를 공급하게 됐다. 9년 뒤인 1997년엔 광양 제철소 고로에도 전량 자사 제품을 장착하게 됐다.

독자 기술 개발 22년 만에 일궈낸 기적이었다.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포스코의 고로에 쓰이는 풍구를 엄격한 품질 검사를 통해 독점 공급하게 되자 회사의 글로벌 인지도는 덩달아 뛰었다. 2007년 3300만 달러어치를 수출했고, 올해는 그 실적이 4200만 달러를 웃돌았다.

이 회사의 연간 생산량(4500개) 가운데 75%를 25개국 30여 개 제철소에 수출하는 등 외화 획득의 효자종목으로 떠오른 것이다. 오 사장은 “세계시장 점유율 1위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자랑 삼아 말했다. 서울엔지니어링 품질보증본부장 오영석 상무는 “여기까지 오는 데 포스코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지만 개발 당시엔 포스코가 야속하기조차 했다”고 돌이켰다.

가뜩이나 부도가 난 마당에 슬쩍 눈감아 줄 만한 하자까지 가차없이 불량 판정을 내렸으니 애가 탔을 법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오히려 보약이 됐다. 포스코의 까다로운 품질 기준을 만족시키자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포스코와 거래한다는 사실은 해외 바이어들에게 보증수표나 마찬가지”라고 오 상무는 덧붙였다.

든든한 협력업체의 존재는 포스코에도 큰 힘이 됐다. 국산 풍구는 해외 제품보다 값이 30%가량 싸 원가 절감에 기여한다. 조업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돌발상황에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포스코의 조업기술이 외국으로 유출될 위험성도 작아진다. 주물은 대표적인 ‘3D’ 업종으로 꼽히지만 세계 최고 기술과 접목된다.

포스코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파이넥스로에 사용되는 풍구는 당연히 세계 최초 제품이다. 일반 고로에 장착된 풍구는 뜨거운 바람을 공급하지만 파이넥스로 풍구는 산소를 불어넣는다. 유체역학이 적용되는 내부구조와 몸체 성분 또한 일반 풍구와 확연히 달라 파이넥스로 풍구는 서울엔지니어링만이 갖춘 노하우의 산물이다.

글로벌 불황은 이 회사의 경영에도 짐이 된다. 내년 4월까지는 이미 수주한 물량으로 그럭저럭 버티겠지만 그 이후를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에 따라 각 나라의 풍구 수요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오세철 사장은 “우리가 어려우면 경쟁업체들은 더 어려울 것”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이런 때일수록 업체 간 경쟁력 격차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앞으로 1년을 잘 이겨내면 우리가 더 확고한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서울 엔지니어링은 4개월 전부터 풍구의 수명을 20% 늘리는 연구작업에 들어갔다. 상황이 어려운 때일수록 원가절감에 기여하는 제품을 만드는 게 생존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수출 활로까지 열어줬다”

Q&A 오세철 서울엔지니어링 사장

포스코에 오랫동안 몸담은 임직원 중엔 오세철 서울엔지니어링 사장을 기억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1970∼80년대 국산 풍구를 개발하면서 협력업체로서 포스코를 제집 드나들 듯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중한 추억이라고 웃으며 말하지만 그때는 인생을 건 ‘도박’이었다고 그는 돌이켰다.

사업초기 어떻게 포스코와 인연이 닿았나.
70년대 초반에는 비철금속을 만드는 업체가 드물었다. 아마 그중에서 가장 유망한 업체라고 봐서 포스코가 우리를 찾았을 것이다.

야심 차게 풍구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부도를 냈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국산 풍구를 개발해 놓고도 포스코로부터 성능을 검증 받는 기간이 길어졌다. 또 당시엔 알루미늄 생산을 병행했고 풍구 설비에 신규 투자를 했는데 그때가 79년께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난 뒤 경제가 불안해졌고, 투자비를 회수하지 못해 자금 경색에 시달리다 5년 뒤 결국 부도를 냈다.

어떻게 극복했나.
부도를 내고서 도망치지 않고 내가 책임을 모두 떠안았다. 86년부터 10년간 법정관리를 받으며 꾸준히 흑자를 내서 결국 빚을 다 갚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 도망가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당시 포스코와 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
국산화하는 데 필요한 실험 설비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기술 협의체제를 갖춰 제품 개발 기간을 최대한 단축할 수 있었다. 또 포스코가 해외 바이어들을 소개해주면서 수출의 길이 열렸다.

창업한 지 40년이 지났다. 당시로 돌아간다면 다시 풍구 개발에 나서겠는가.
그때는 내가 미숙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겁 없이 뛰어들었다. 아마 업계 실정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

현재 시장 상황이 어려운데도 미래를 낙관하는 듯하다.
주문 물량이 내년 4월까지만 차 있다. 그 이후는 우리도 잘 모른다. 다만 창립 당시부터 친인척의 경영 개입을 철저히 막아 비교적 우수한 인재들이 회사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이들이 열심히 일해왔기 때문에 독자 기술을 개발하고 난관을 헤쳐나올 수 있었다. 그들의 애사심과 주인의식을 믿는다.

박성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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