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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사는 어르신 ‘말동무 봉사’ 1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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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사랑의 소리’ 주부 자원봉사자들과 이들로부터 전화를 받는 어르신들이 12일 서울 서초구청 ‘사랑의 소리’ 사무실에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명희·공연임·이성연·이순희· 김혜순·오석종씨(서 있는 사람들이 자원봉사자). [김도훈 인턴기자]

15일 오전 서울 양재1동에 사는 주부 이성연(60)씨는 여느 월요일과 마찬가지로 서초구청 2층의 ‘전화방’을 찾았다. 자신이 맡고 있는 독거노인 18명의 개인별 파일 중 이순희(85) 할머니의 파일을 꺼내 들었다. “할머니, 아침에 뭐 잡쉈어?” 할머니와 정이 든 이씨가 딸처럼 애교 띤 목소리로 묻자, “뭘 먹긴. 된장 지져서 먹었지”라는 할머니의 대답이 수화기를 통해 돌아왔다. 둘의 전화 통화는 금세 10분을 넘겼다. 이씨는 “실향민인 할머니가 한번 마음의 문을 연 뒤 부쩍 말씀을 많이 하신다”고 말했다.

이씨의 ‘전화 봉사’는 2000년 시작됐다. 제주도 출신인 이씨는 중학생 때 한라산 등반길에서 우연히 만난 길안내 적십자 대원에게 반한 후 막연히 봉사의 꿈을 품어 왔다. 쌍둥이 두 아들을 대학에 진학시킨 뒤 여유가 생기자 구체적 방법을 찾았다. 마침 일주일에 한 번 저소득 독거노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건강·식사 여부 등을 챙기는 ‘사랑의 소리’ 자원봉사를 만나게 됐다.

사랑의 소리 자원봉사자 20명 중 가장 오래 활동해 온 이명희(55)씨는 “전화 봉사를 처음 시작한 1996년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젊은 사람도 이용하기 힘든 경사 가파른 계단, 빛 한 뼘 들지 않는 깜깜한 지하 단칸방에서 아무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생활하는 할머니·할아버지들. 이씨는 가슴이 먹먹했다고 한다. “‘강남 부자 동네’라고 불리는 서초구에도 이런 환경에 처한 노인들이 있다니…. 이렇게 힘든 여생을 보내시는 분들이 가까운 곳에 있었구나….” 이명희씨는 “그런 첫인상 때문인지 13년째 봉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랑의 소리 자원봉사의 시작은 95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방배동에서 혼자 살던 한 노인이 숨진 지 일주일 만에 발견된 사건이 발생했다. 부랴부랴 비슷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이 논의됐고 이듬해 2월 사랑의 소리가 출범했다. 구청이 전화 걸 수 있는 공간, 전화 안부가 시급한 노인들의 명단을 마련해 줬다. 해가 바뀔 때마다 한두 명의 노인이 세상을 떴고, 자원봉사자도 조금씩 물갈이가 됐지만 20명 안팎의 주부가 돌아가며 70∼80명의 노인에게 꾸준히 전화를 걸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50∼60대다. 절반 이상이 7년 넘게 봉사한 베테랑들이다. 이성연씨나 이명희씨처럼 작은 계기로 봉사를 시작해 ‘중독’에 이른 평범한 주부들이다. 전화를 받는 노인 68명은 70∼80대가 대부분이다. 저소득 노인이 많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서도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워 전화해 줄 것을 요청한 이도 있다.

지난달 말 사랑의 소리 누적 전화 통화 건수는 20만 통을 넘겼다. 주말을 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60통꼴로 전화한 것이다. 12일에는 자원봉사자와 노인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더운 밥, 따끈한 국 점심을 함께하는 ‘만남의 날’ 행사도 열었다.

안부를 묻는 ‘전화 봉사’에서 시작해 ‘전화 말벗’으로 정이 든 일부 봉사자와 노인들은 오프라인 만남을 갖기도 한다. 김혜순(56)씨는 왼쪽 다리 신경통으로 앉기조차 불편해 하던 오석종(85) 할아버지를 2002년 처음 만났다. 오씨 할아버지의 상태에 가슴이 아팠던 김씨는 아는 한의원을 통해 몇 년째 침과 한약 처방을 무료로 받도록 주선했다.

사랑의 소리 이귀순(62) 회장은 “지하방에 사는 한 할머니가 요즘 들어 부쩍 방이 춥다는 하소연을 한다”며 “찾아 보고 심각하면 봉사자들이 틈틈이 모은 회비에서 전기장판이라도 사 드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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