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 칼럼

억울하면 출세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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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400, 800, 300. 이 세 숫자의 크고 작음을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다. 어느 것이 가장 힘이 세냐고. 세상의 대부분은 큰 것이 힘이 세다. 이처럼 수치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도 이 질문의 답은 300이다. 단위가 서로 다르다는 얘긴가. 그렇지 않다. 똑같이 ‘억 달러’가 붙는다. 하지만 최근 현실에서 증명된 힘은 300이 가장 컸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2400억 달러=엄밀히 말하면 2397억 달러다. 9월 말 현재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이다. 이런 돈을 쌓아둔 목적은 외환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외환위기란 한마디로 외환(달러)이 바닥난 상황을 말한다. 1997년 말이 그랬다. 세계 10위권을 넘보며 뻐기던 당시 한국 경제는 무참하게 박살났다. 미국과 달러의 힘이 그렇게 강한 줄 미처 몰랐다. 그 뒤 다들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한 덕분에 이런 거금을 쟁여놓게 됐다. 당시 우리가 한껏 몸을 낮췄던 국제통화기금(IMF)의 현재 가용자금이 2000억 달러 정도라고 하니 이 돈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고 보니 그 돈은 별게 아니었다. 비상시에 쓰려고 비축해둔 것이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쓰기 어려웠다. 시장의 어마어마한 달러 요구에 응하기엔 너무 적었다. 돈놀이를 위해 이 땅에 들어와 있던 외국 자본이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위기에 빠진 자국과 자기 회사를 살리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한국 경제는 과거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다고 외쳤지만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종잇조각에 불과한 원화를 달러로 바꿔갔다. 그 바람에 원화가치는 추락(환율 급등)을 거듭했다. 시장을 관장하는 장관과 학계의 고수들이 나섰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10월 27일 이명박 대통령이 5년 만에 국회 시정연설을 하면서 “단언컨대 외환위기는 없다”고 말했지만 마찬가지였다. 환율 안정을 위해 보유 외환을 쓰다간 11년 전 상황이 재연될 것이라는 우려가 발목을 잡았다. 멋진 칼을 갖고 있었지만 빼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800억 달러=10월 24일엔 이런 방패도 제시됐다. 한·중·일 3국과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이 위기 때 서로 돕자며 내년 상반기까지 800억 달러의 공동기금을 조성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북미와 유럽과 남미는 이미 하나의 시장을 만들었거나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 합의는 아시아만 제각각인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조치였다. 무소불위의 파워를 과시하던 월가가 빈사상태에 빠지며 국제 금융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아시아가 그 중심에 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기금은 11년 전 그런 목적에서 출발했다. 아시아 외환위기 때 “우리끼리 힘을 합치자”는 일본의 제안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세계 금융주도권 약화를 우려한 미국과 IMF의 반대로 별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뉴욕발 쓰나미로 지구촌 전체가 심각한 피해를 보는 상황에 이르자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한·중·일의 공조는 그들의 보유 달러를 감안할 때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중국은 2조 달러에 이르고, 일본은 거의 1조 달러다. 그럼에도 서울 외환시장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300억 달러=10월 29일 오후 우리나라가 미국과 통화 스와프를 체결한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다음 날 금융시장은 놀랄 만한 변화를 보여줬다. 주가는 115포인트(12%) 올랐고, 환율은 달러당 177원이나 떨어졌다. 배우자를 바꿔 즐기는 ‘스와핑’은 부도덕하기 짝이 없지만 또다른 스와핑이 이렇게 고마운 줄은 몰랐다.

통화 스와프란 두 나라 돈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 원화를 미국이 달러로 교환해 주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원화를,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는 주체다. 따라서 통화 스와프는 한국에서 달러를 발행하는 효과를 지닌다. 스와프 한도는 300억 달러로 정해졌다. 우리의 보유 외환에 비하면 8분의 1에 불과한 돈이다. 그런데도 그 어떤 조치보다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똑같은 미국 달러인데도 왜 이렇게 파워는 다르게 전달되는가. 그건 힘을 행사하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동네 꼬마가 제 키보다 큰 몽둥이를 들고 설쳐도 우습게 보일 뿐이다. 하지만 마을의 질서를 만드는 자가 나서면 그게 곧 법이 된다. 민간기업이 발행한 어음을 중앙은행이 직접 사주는 일은 어느 경제학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 미국은 그런 일을 앞장서 했다. 세상은 본래 그런 곳이다. 그렇게 불공평한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우리네 조상들은 일찍이 그렇게 말했다.

심상복 경제부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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