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대미관계 ‘양손에 떡’… 북한, 제2 파키스탄 될 가능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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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제2의 파키스탄’이 될 수도 있다.” 동아시아 전문가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개번 매코맥(70·사진) 호주국립대 명예교수의 불길한 예언이다. 파키스탄처럼 핵무기를 보유한 채로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이 동의한 시설과 장소에 대해서만 핵 사찰을 실시한다는 조건을 수용하고,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 게 그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1회 한국·호주 리더십 포럼 참석차 캔버라를 방문한 배명복 논설위원이 매코맥 교수를 만났다.

만난 사람 =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다고 보는가.

“매우 어렵다고 본다. 감출지언정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미국의 태도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북한을 강하게 몰아붙이지 않고 있다. 플루토늄 생산을 중단해 핵무기의 추가 생산만 하지 않고, 이미 만든 핵무기나 핵물질을 외부로 유출하지만 않는다면 핵무기 몇 개 정도는 용인할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뀐 게 아닌가 싶다.”

-결국 핵무기도 보유하고, 미국과의 관계도 정상화하는 ‘파키스탄 모델’로 간다는 뜻인가.

“‘제2의 파키스탄’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검증 과정이 남아 있지 않은가.

“검증은 결국 신뢰의 문제다. 북한이 핵무기 중 일부를 어딘가에 숨겨놓고, ‘우리는 핵무기를 다 없앴다. 우리를 믿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 땅을 다 파헤칠 순 없는 것 아닌가. 결국 검증 문제는 북한을 신뢰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면서 북한이 동의한 곳에 대해서만 사찰을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북한이 몇 개 정도의 핵무기를 은닉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설마 북한이 그것을 사용하거나 외부로 유출하기야 하겠느냐는 ‘자기충족적 예언’하에 북한 핵 문제를 마무리 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6자회담의 3단계 협상은 매우 길고, 어려운 과정이 될 것이다.”

-북한이 ‘제2의 파키스탄’이 되면 한국과 일본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한국이 미국에 강력히 항의하는 상황이 예상된다. 일본의 핵 무장 가능성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이 핵 무장을 하는 순간 미국과의 관계는 근본적 변화가 불가피하다. 미국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

-최근 귀하가 출간한 책 『종속 국가 일본』에서 주장한 대로 일본은 여전히 미국의 종속 국가로 남는다는 뜻인가.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긴 하다. 과거 일본의 대미 종속에 대한 우려와 비판은 좌파 쪽에서만 나왔지만 지금은 보수 우파 진영에서도 나오고 있다.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공감한다면서도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뜻대로 하는 미국을 보면서 배신감을 느낀 일본인이 많다. 그럼에도 미국에 의존하는 종속적 성격에는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을 것이다. 총리가 미 대통령에게 “I want you, I need you…”란 노래까지 부르며 재롱을 부리는 나라가 일본이다.”

-국익을 위해서는 더한 것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현실과 실체를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쇠락하고 있다. 더구나 조지 W 부시 정권 아래서 미국은 폭력적이고 무법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미국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과연 국익에 부합하는 것인지 지도자라면 냉정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한국의 김대중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국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유지하면서도 자율성을 추구하는 제스처라도 보였다. 하지만 역대 일본 총리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조건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굴종적이고 예속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국은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한계를 안고 있다. 주변 강대국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영토적 야심이 없는, 멀리 떨어진 강대국과 손을 잡는 것은 논리적인 선택 아닌가.

“동의한다. 하지만 미국의 힘은 쇠퇴하고 있다. 대신 중국의 힘은 급격히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꼭 어느 한쪽을 택하는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선택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제3의 선택도 있을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를 추구했던 것처럼….”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균형자도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다자적 관계에서는 불가능할 것도 없다. 다자 안보구조를 통해 미국의 세력 약화에 대비하고,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한국, 동남아에서는 태국 같은 나라가 다자 안보구조의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일본은 미국 및 호주와의 삼각동맹을 강화함으로써 중국의 위협에 대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하지만 올바른 선택은 아니다. 호주의 경우 노동당의 케빈 러드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미관계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존 하워드 전 총리 하에서는 호주 역시 대미 종속국의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러드 정권이 들어서면서 보다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균형자 역할을 외교정책의 전략적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러드 총리도 호주 외교의 3대 축 가운데 하나로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러드 총리는 처음부터 중국을 견제하거나 봉쇄한다는 개념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중국과 협력적 관계를 갖는 것이 미국과의 동맹관계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캔버라에서 열린 한·호주 리더십 포럼에서도 미국의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라는 딜레마적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최대 이슈였다. 한국이나 호주 같은 아태 지역 중견국가들로서 무엇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보는가.

“미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유엔을 중심으로 한 다자적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한 가지 선택일 수 있다. 동아시아 다자 안보구조를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한국 외교의 대미 의존적 성격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반면 남북관계는 악화일로에 있다. 이명박 정부의 대외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한국의 국내 문제에 대해 말하기는 조심스럽다. 굳이 말하자면 김대중과 노무현 전 정부의 대외정책에는 단순한 실용주의를 넘어 일종의 전략적 비전 같은 것이 있었다고 본다. 또 대미관계도 중요하지만 남북관계도 중요하다는 균형감각도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대미 일변도로 가면서 남북관계가 묻혀버린 느낌이다. 균형을 찾았으면 좋겠다.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가 남북관계 개선의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세계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해석하는가.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역할의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물론 글로벌 체제로서 자본주의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공적 분야와 사적 분야의 조정 필요성은 분명해졌다. 이것이 첫째 의미다. 둘째는 미국과 나머지 세계의 관계도 재조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 돈으로 분수에 넘치는 소비를 즐기며 살아왔지만 이것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졌다. 미국 중심의 단극적 세계 경제체제가 다극적인 글로벌 경제체제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번 사태의 교훈이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동아시아가 경제, 특히 통화 문제에서 공동 보조를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본다.”

-여론조사대로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차기 미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의 진로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보는가.

“그동안 오바마가 한 말만 놓고 보면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김정일과도 대화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세계의 여론에 보다 신경을 쓸 것이라고 보면 일방주의 외교에서 벗어나 다자주의 외교를 강화할 것이고, 모든 문제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보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한다.”

-오바마의 집권이 미국의 쇠퇴를 막을 수 있다고 보나.

“경제적으로는 어렵다고 본다. 미국 경제의 쇠퇴는 너무 심각해 되돌리기가 불가능하다. 오바마가 집권하면 국제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내적으로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자본과 노동, 부유층과 빈곤층의 관계 조정은 불가피할 것이다. 양자 간 불균형이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치적 색깔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5~10년 전이라면 쉽게 대답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기 어렵다. 인류가 새롭게 당면하고 있는 환경 등 생태적 문제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생태론적 좌파라고 할까. 단순히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은 요즘 현실에 맞지 않는다.”

캔버라에서 bmbmb@joonganag.co.kr

◆매코맥은 누구=호주 수도 캔버라에 있는 호주국립대학(ANU) 캠퍼스에서 만난 매코맥 교수는 상아탑의 수도승 같은 느낌이었다. 젊은 시절, 불교에 심취해 일본을 찾은 것이 동아시아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호주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국적은 영국이다. 호주와 일본·영국을 오가며 동아시아에 천착해 왔고, 1974년 런던대에서 중국 군벌과 일본 제국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세계적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남북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30년 가까이 한반도 문제를 추적해 왔다. 18권의 저서 중 『종속 국가 일본』(2008), 『범죄 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2006), 『일본, 허울뿐인 풍요』(1998),『남북한 비교연구』(1988) 등 4권이 한국어로 번역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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