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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파동후… 정덕희의 반성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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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자고 나면 유명인들의 학력 위조 사실이 드러났던 지난해 여름. 기자는 갑자기 이런 궁금증이 일었다. 학력 위조 명단에 올랐던 저 많은 유명인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복귀를 할까. 예상컨대, 반은 은근슬쩍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복귀할 테고, 또 반은 대중과 멀어져 철저히 고립될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을 보니 기자가 미처 생각지 못한 유형의 복귀자도 있는 것 같다. 정덕희, 그녀는 지금 통렬한 자기 반성 후 대중 앞에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하고 있다. 정덕희가 토해내는 진심 어린 자기 반성문.

학력 위조 사건이 터진 후 8개월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비친다는 그녀는 약간 살이 오른 듯한 얼굴에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 또한 여전했다.

감옥 아닌 감옥에서 지냈던 지난 시간

“전보다 얼굴이 더 좋아졌죠?(웃음) ‘정덕희 그동안 안 보이더니 확 삭았네’라는 말 나올까봐 일부러 더 잘 먹고 더 잘 잤어요.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내가 인생의 주인이고, 내 주위엔 아직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고 위로하면서 이렇게 살아났습니다.‘ 자뻑당’의 당원이 돼야 인생이 행복하다는 말도 있잖아요.”

지난해 8월, 한 주간지의 보도에 의해 학력 위조 논란에 휩쓸린 정덕희는“당시만 생각하면 아직도 오금이 다 저린다”며 숨가빴던 그때의 상황을 언급했다.

“강의를 하러 옥천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는데, 문제의 시사주간지 기자에게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저는 학력에 대해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니 확인을 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죠. 그 기자는 확인후 다시 전화를 준다고 했지만 그 후로는 연락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심 없었던 일로 넘어갔나 보다 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며칠 뒤에 특종이라며 제 기사가 실린 거예요. 그 뒤로 전화기에 불이 나고, 집 앞 에는 기자들이 찾아와 진을 치고…. 하루아침에 ‘정덕희=죽일년’이 된 거죠. 온몸에 감각이 없어지면서 정신은 공황상태에 빠지더군요.”

정덕희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한 번도 이력서에 대학원 졸업이라고 표기한 적이 없단다. 또 주간지의 주장처럼 해당 대학에서 잠깐 강의 한 것이 아니라, 2년 동안 교양 필수 과목을 정기적으로 진행했다는 것. 이처럼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만큼 당시 정덕희는 학력 논란이 됐던 다른 유명인들과 달리, 네티즌들 사이에서“위조가 맞다”“아니다”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때의 일에 대해 정덕희는“과정이야 어찌 됐든 포털 사이트에 기재된 대학원 졸업이라는 문구와 내 이름으로 출간된 책에 교육학 전공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적극적으로 수정하지 않은 것은 잘못한 일이다”고 반성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동국대 교육대학원 교육 경영 연구 과정 2년 수료예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졸업은 아닙니다. 교육학 전공이라고 말하고 다니면 당연히 졸업한 걸로 알지, 누가 수료한 걸로 알겠냐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데 맞는 말씀이세요. 저 역시 이런 애매모호한 표현들로 대학 나오지 않은 걸 교묘하게 피해 가고자 했던 것이 사실이고요. 참 많이 부끄러 웠습니다. 속된 말로 쪽팔렸습니다. 한국 사회 에서 대학 안 나온 사람들은 사람 취급도 못 받으니까요. 대학 안 나온 것에 대한 세금을 낸다고 생각하며 반성, 또 반성했습니다.” ‘행복 전도사’라는 닉네임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며 만인에게 웃음을 전파했던 정덕희. 언제나 웃는 얼굴로 유쾌한 삶의 철학을 속사포 처럼 쏟아냈던 그녀인지라, 그녀의 학력 위조 논란은 적잖은 충격과 실망감을 안겨줬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정덕희는 “나는 분명히 고졸임을 말하고 다녔는데 이제 와 이런 논란은 억울하다”며 활발히 해오던 강의들도 접은 채 잠정적인 칩거에 들어갔다. 이후 가슴속에 할 말, 못할 말이 산더미같이 쌓였지만 때를 기다렸다는 그녀가 이제야 속내를 활짝 열어 보였다. “오늘 이렇게 기자님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나오더라고요. 무슨 눈물이냐고요? 감사의 눈물요.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다니, 또 내 말을 들으려고 해주시다니 너무 고마운 거예요. 사건 후 마음고생을 하면서 세상엔 감사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세상엔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못지않게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절감했다는 그녀는 그동안 너무 혼자서만 들떠 지낸 것은 아닌지 통렬하게 반성했단다. “워낙 색깔 있는 여자로 알려지다 보니 방송 초창기부터 열렬한 팬과 안티가 극과 극으로 나뉘어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천 명의 동지를 만들기보다 한 명의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는 말이 새삼 떠오르더군요.‘여성들의 선생’ 이라 자처하며 워낙 입바른 말을 하고 살아온 지라 저만큼 구업을 많이 진 사람도 없을 거예요. 신기가 발동하면 나도 모르게 마구 쏟아내는 네거티브한 언어들로 저도 모르게 상처받은 분들도 계실 거고요. 지금이라도 저의 말과 행동 때문에 행여 상처받은 분들이 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에 대한 오해가 있다면 푸셨으면 좋겠고요.”

최근 전국을 순회하며 강의를 시작했는데, 강의가 전보다 더 ‘진국이 됐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는 그녀는 “성숙과 반성이라는 효소가 가미될 때 사람은 숙성되는 것 같다”며“무엇보다 끝까지 힘이 돼준 가족들에게 가장 고맙다”고했다.

언론에 부부가 함께 얼굴을 잘 안 내비쳐서 그런지 불화설이 끊임없이 따라붙고 있는 정덕 희는“남편이 워낙 카메라 울렁증이 있어 그렇다”며 이런 소문들을 일축했다.

“절 보고 혼자 사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으세요. 또 여자가 혼자 잘났다고 너무 나대니까 남편이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근데 남편과 저는 소위 말하는‘뽄드 궁합’이에요. 시어머니가 남편과 저의 궁합을 보시고는 점쟁이가 뽄드 궁합이라고 했다며 후다닥 결혼시켜 주셨어요. 남편은 연세대 석사 출신이고 전 고졸이에요. 하지만 지금의 이 집안 세간 살림이며 모든 걸 다 제 힘으로 장만했습니다. 남편은 딱 2년 동안만 생활비를 벌어다 줬고요. 이것만 봐도 꼭 가방 끈이 길다고 돈 잘 벌고 성공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웃음). 학력 파문 당시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그러더라고요.‘ 쯧쯧… 남편하고 몸을 섞었으면 학력도 섞을 것이지…(웃음)’유난스러운 걸 좋아하는 저와 달리 남편은 조용한 사람이지만 세상 누구보다 큰 힘이 돼주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또 하나 정덕희의 자존심을 지켜준 사람은 바로 자식들이다. 나이가 드니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 아이들을 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녀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도 자식들 덕에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데, 잘 알고 지내는 설악산 봉정암의 구암 스님이 산에 한 번 오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아들과 함께 첩보 작전 수행하듯 기자들이 집 앞에 없는 틈을 타 설악산으로 향하는데, 자주 들르던 ‘홍천 돼지 고추창 숯불구이집’이 보이는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매콤하게 양념된 돼지고기를 구워 먹으며 시름을 달래고 싶은데, 도저히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문 앞까지 갔다가 쪼르르 다시 차 안으로 들어와 버렸죠. 그 모습을 보고 아들이 속상해하는데, 눈물이 나오는 걸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대학원까지 졸업했지만 취직을 못해 정덕희의 일을 도왔던 아들은 최근 취업에 성공해 그 녀의 마음이 몇 배 더 흐뭇하단다. 딸 역시 누구보다 정덕희의 편이 돼주며 언론사 인터뷰 가 있기 전날은 예상 질문까지 만들어주며 그녀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한다고.

“우리 아이들이 아직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앉을 나이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공부를 잘해서 의사나 변호사가 된 것도 아니지만, 제가 봐도 아이들이 저보다 나은 것은 확실합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통에 어려서부터 어른들과 함께 생활해서 그런지 예의도 바르고요. 밖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엄마 편이 돼 주는 아이들이 있어 참으로 든든합니다.”

잘난 세상, 계속‘오버’하며 살리라

원래 정덕희 인생에서 ‘7’자로 끝나는 해가 주는 의미는 남달랐단다. 1987년에는 고졸 여직원으로서 아예 승진 자체가 불가능한 조직 문화 속에서 운 좋게 승진을 했고, 1997년에는 전업 주부에서 사회인으로 변신했다. 또한 그 해는 그녀가 방송 강의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해 다. 이렇게 정덕희 인생에서 7은 변화의 숫자였는데, 2007년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앞선 연도 들과 달리 고통과 반성의 날들로 보냈단다.

“2007년은 왜 지난날들과 다를까? 행운은커녕 이런 아픔을 주시다니…. 그때는 이유 없이 씁쓸하고 우울했던 게 사실이에요. 근데요,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 전 연도들과 다를 게 없었던 아주아주 의미있는 해였던 것 같아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자만하고 있던 제게 어 찌 보면 가장 큰 가르침을 준 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남들보다 가방끈이 짧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남보다 과한 노력을 한 것이 지금의 정 덕희를 만들었다는 그녀는 비온뒤 땅이 굳는다고 이번 일로 더욱더 성숙한 ‘인생 강사’가 됐다고 한다.

“진하게, 강하게, 짧게, 그리고 버린다가 저의 처세술입니다. 지난 일에 대한 반성을 가슴 깊이 새기고 더더욱 대중 속으로 들어가 행복을 전파하고 싶습니다. 이동 시간이 많다 보니 연예인들이 많이 타는 밴을 타고 다니는데 지금 타고 있는 차가 벌써 세 번째 차예요. 차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엔진이 주저앉도록 타고 다닌 터라 어쩔 수 없이 바꾼 거고요. 저에겐 차가 곧 연구실이요, 응접실이요, 수면실입니다. 그동안의 주행 거리만 100만 마일… 그 주행 거리만큼 눈도 넓어졌고 만난 사람 수만큼 경험도 쌓였습니다. 내게는 사람이 곧 선생이었고 길이 곧 학교였습니다. 앞으로도 ‘정덕희답게’쉽고 편안하게 사람들을 만날 생각입니다.”

사실 정덕희만큼의 역마살과 인연살을 타고 난 사람도 없다. 누군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람을 많이 만난 이로 남자는 송해, 여자는 정덕희라고 했단다. 한 차례의 통렬한 자기 반성 후 평정심을 되찾은 그녀는 예전보다 한결 여유로워졌다.

“나이를 먹으니 제 마음이 편한 쪽으로 가게 됩니다.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저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고요. 언젠가 가수 이은하가 묻더군요. 이렇게 조그마한 체구에 서 어떻게 그런 열정이 나오냐고요? 전 사랑 이라고 답했습니다. 전 사랑 없이는 단 한순간도 못 사는 사람입니다. 가슴에서 들끓는 뜨거운 사랑을 만인에게 내뿜으며 계속해서‘오버’하며 살겠습니다.”

그녀는 조만간 학력 위조 파문에서부터 지금 까지의 얘기들을 묶은『그럼에도 행복하소서』(중앙Books)라는 책을 독자들 앞에 내놓을 예정이다. 정덕희의 방황과 고뇌, 반성과 성숙이 모두 담겨 있는 이 책은 정덕희에게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될 듯.

“행복 전도사로 알려져 있는데 그 말도 좀 건방진 것 같아 이제부터는‘행복지기’로 바꾸려고 합니다. 사건 후 우울증에 대인기피증까지… 말로 다 표현 못할 반성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가슴에 들끓는 사랑을 나누고 싶어 다시 여러분 앞에 나섭니다. 인간 정덕희의 짝사랑을 조금만 마음을 열고 받아주십시오.” 전업 주부로 살다가 IMF 외환 위기 당 시 황수관 박사와 함께 TV에 출연,‘ 행복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으며 스타 강사가 된 정덕희. 학력 위조 파문을 겪으면서 인생을 더 깊이 알게 됐다는 그녀는 반성이라는 효소로 한층 더 성숙한 인간이 된 것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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