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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말단이 혼자 비행기 타고 태국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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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현대건설의 위기는 태국에서 다시 닥쳐오고 있었다. 김영주 회장은 당시의 정주영 회장이 결코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인이 아니었다는 말로 그때 절박했던 상황을 회고했다.

▶태국 나라티왓 공사현장에 있는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직원.

“문을 닫자고 중역들이 건의한 공사가 고령교 건이 하나 있었다고 했지요? 그 다음이 태국 건설성에서 세계은행(IBRD) 차관을 얻어 국제입찰에 부쳤던 나라티왓 고속도로 때였어요. 그게 522만 달러로 수주해서 준공 때 보니까 820만 달러가 들어가서 300만 달러 손해를 본 겁니다. 그때 또 문을 닫자고 했어요. 65년 그 당시 300만 달러면 엄청난 금액이오. 왕복 2차로 98km를 522만 달러에 수주했다고 국가적인 경사라고 했는데 300만 달러가 손해니 그게 얼마나 큽니까. 그때 내가 상무로 나가서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 당시 현대건설 전체가 태국으로 옮겨왔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인력을 쏟아 부었는데도 그런 손실이 났어요. 그러니 공사 중간에라도 빨리 손을 털고 나가는 게 그나마 회사를 유지하는 거라고 전부 그랬지요.”

-그처럼 손실을 보게 된 이유가 뭡니까?
“국제 시방서대로 해야 한다는데, 그런 게 있다는 것도 우린 그때 처음 알았고, 고속도로 공사에 투입되는 장비가 별도로 있다는 것도 몇 번 애를 먹고서야 처음 알았고, 거기다가 기후까지 그런 악천후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그런 것도 처음 알았고, 게릴라까지 준동하고 아무나 긴 칼을 휘두르고 해친다는 것도 당해 보고 알았으니 말이지, 전부 모르는 것투성이고 처음 알게 된 것밖에 없는데 무슨 수로 이익을 남기고 공사를 합니까. 결국 그만큼 사전 지식이나 준비가 없었다는 얘기니까 누굴 탓할 수도 없어요. 그런데다 고속도로 공사는 전혀 경험이 없었으니 가령 1km를 아스콘 깔면 감독관이 와서 다 뜯어내라는 거요. 국제 시방서대로 안 됐고 규정에 못 미친다고. 전부 드릴로 구멍 다 내고 죄다 뜯어내요. 미쳐요. 감독관이 IBRD 자금으로 했기 때문에 미국 사람이 나왔는데 여간 철저하고 독한 게 아니오. 도저히 계속할 수 없으니까 철수하자고 했지요. 근데 명예회장님이 딱 안 된다는 겁니다. 명예회장님도 감독관하고 엄청 다투고 싸웠어요. 그렇지만 그 친구하고 싸우는 건 싸우는 거고 철수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300만 달러 적자보며 공사 계속

현대라는 간판을 내려야 할 정도로 손실이 누적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공사를 끝까지 마쳐야 한다는 정 회장의 심정인들 오죽했겠는가.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끝까지 현장을 떠날 수 없다고 했을 때는 기업인으로서의 독특한 철학이 있었을 것이다. 생전에 정 회장이 들려준 당시 상황에 대한 회고는 듣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를 수 있겠지만 국가관과 신용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조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때 말이야, 사실 나는 열심히 하면 ‘똔똔’ 내지는 조금 마진이 있고, 편안하게 하면 손해를 볼지 모르겠다, 그렇게 봤거든? 그래가지고 그 더운 정글에서도 편하게 등 한 번 붙이고 잤다는 기억이 없어요. 그냥 신문 깔고 잠시 잠시 눈만 붙이는 정도로 했어. 그러니까 매일 시간 싸움을 하면서 해나간 거예요. 근데 어느 날 보니까 적자야. 적자도 보통 적자가 아니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적자야.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뭐 이유 따질 때는 이미 늦은 거 아니겠어? 주판을 놔 보니까 손해라는 게 명백한데. 그러니 영이(김영주 회장을 기분 좋을 때는 영이라 부르고 진지하게 얘기할 때는 영주 회장이라고 했다)고 누구고 할 것 없이 전부 한 번씩은 내 앞에 나타났다가 그냥 가고 그냥 가고 하는 거야. 철수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데 내가 인상을 쓰고 있으니까 말은 못하고 물 빠진 낙지처럼 축 늘어져서 돌아가고 말이지, 하하항.”

-그럼 회장님은 중역들이 왜 왔는지를 알고 계시면서도 말씀을 안 하셨군요.
“철수를 어떻게 해요. 생각해 보세요, 그때가 한국 건설업체로는 우리 현대가 처음 나간 해외공사인데, 그것도 IBRD에서 건설자금을 대줘가지고 하는 공사였는데, 중도에 포기하고 철수해요? 그건 생각조차도 해서는 안 될 일이야. 더구나 이유를 불문하고 원인도 책임도 우리한테 있었어요. 어떻게 철수하겠다는 소리를 해. 만약 현대 하나만 나가서 그 공사로 모든 게 그만이고 다시는 해외 진출을 안 한다면 몰라, 거기서 손실이 크다고 중도에 포기하고 철수하게 되면 앞으로 대한민국 건설업체가 해외에 진출한다는 건 끝나는 거 아니에요? 완전히 길이 막히는 거야. 감독관 보고서는 전 세계에 도는 건데 말이지. 내 생리상 재정적으로 얼마를 어떻게 손실이 나게 됐건 계약을 했으면 양질의 건설을 공기 내에 마쳐야 되는 거지 중도 포기라는 건 없어. 나는 그렇게 해왔어. 우리 힘만으로 안 되면 나라 힘을 빌려서라도 태국 정부가 원하는 대로 완공해야 되는 거예요. 한국의 얼굴을 봐서도 그렇게 해야지 어딜 중도 포기라는 소릴 해? 전부 완공하느라 반쯤은 죽었지, 하하항.”

현장의 모습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했다. 그 당시 태국 공사의 경리를 맡아보면서 낮에는 현장을 누벼야 했던 말단이 이명박 대통령이었다(이후 현대 직책으로 소개한다). 이 회장은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현실감 있게 현장 상황을 회고했기 때문에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사실 장비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나갔으니까 되돌아보면 손실은 필연이었다고. 우리가 1965년에 태국에 갈 때 한국에서 제일 좋다는 장비를 가져갔어요. 물론 그것도 미8군에서 쓰던 거 불하 받아 고치고 손보고 그런 거지만. 그걸 배에 싣고 태국까지 갔는데, 태국에 나와 있던 감독관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이런 장비 가지고 고속도로 뚫으려면 10년 걸린다, 버려라. 그러니 포장도 뜯어보지 못하고 그대로 버린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엄청나게 버렸다고. 그러니까 뭐 엉망이고 건질 게 하나도 없어. 거기서 장비를 다 새로 도입해서 썼어요. 현대건설에서 제일 큰돈 들여서 가져간 장비조차 한 번도 못쓰고 버렸으니 말 다한 거지, 허헝.”

▶이명박 대통령이 현대건설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개인 사무실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모습.

-그때는 관리직으로 나가셨던 겁니까?
“신입사원은 나 한 사람만 처음 나갔는데 관리직 경리사원으로 조인을 했지, 일차로. 되게 부러움을 샀어요. 그 당시 해외에 간다는 게 어마어마한 일이었잖아요. 더구나 몇몇 사람은 배를 타고 가는데 나는 말단 중에 혼자 뽑히고 태어나서 비행기도 타보고 말이야. 프로펠러 비행기지만, 허허헝. 그 당시 김포공항을 떠날 때 태극기를 들고 나갔다고요. 회사 깃발을 든 게 아니고. KBS가 나와가지고 생방송을 하고 우리는 비행기 앞에서 졸업사진 찍듯이 쭉 서가지고 사진도 찍고 말이야, 허허헝. 현대가 나가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이 역사 이래 처음 해외 나간다고 그랬다니까. 지금 생각하면 우습고 오래된 얘기지만.”

-그 당시 정 회장님과 감독관들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허허헝, 있었지. 아마 정 회장께서 공사판 인부들이 보는데 싸우는 건 그때 첨 봤고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가 고속도로라는 걸 태국에서 처음으로 시공해 보는 거잖아요. 국내에서는 그 당시에 도로포장이라는 게 그냥 사람 손으로 아스팔트 깔고 미군 장비 얻어다가 밀고 그랬던 건데, 태국에서는 세계은행 자금으로 공사를 하니까 외국회사 감독관들 하고 기술자들이 나오고, 또 금융 해준 사람들이 나와서 평가를 할 거 아니에요. 근데 도대체 국제 시방서대로 공사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람들 눈에는 전부 원시적인 방법이고 대충하는 걸로 보이고, 그랬을 거 아니야? 실제로 그렇게 했고. 요령을 피워서 그런 게 아니라 경험이나 장비나 실력이 거기까지였으니까 도리가 없었다고. 그러니까 감독관이 중간평가를 하면서 뜯고 다시 하라 그거야. 그때 정주영 회장이 사장 겸 사주잖아요. 속이 뒤집힐 거 아니야. 비싼 돈 들여 포장까지 다 해놨는데 전부 뜯어라 하니까 말이지. 우리 한국에서는 적당히 하던 때고 인간관계로 얘기하면 통하고 그랬는데 감독관이 어디 그래? 시방서대로 안 됐으니까 뜯어라 이거야. 그게 잠깐 좁은 공간을 뜯으라는 것도 아니고 예를 들면 1~2km씩이나 되는 건데 얼마나 속이 뒤집어지겠어요. 뜯어라, 못 뜯는다, 나중에는 정주영 회장이 의자를 들고 길바닥에 딱 앉아서 나는 못 뜯는다, 뜯어라, 차가 충분히 다닐 수 있는데 왜 뜯으라 하느냐, 못 뜯는다, 허허헝. 그게 일주일씩 버티고 싸우는데, 지금 얘기니까 우습지 기가 막히는 거야. 중역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말이지. 감독관이 뜯으라 하는데도 안 뜯고 버티다가 공사 진행 못하도록 명령서가 떨어져버리면 거기서 공사는 딱 스톱이라고. 한 발짝도 못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수많은 사람, 수많은 장비가 그대로 서 있어야 할 판이니까 결국은 따져보면 아깝지만 뜯어서 다시 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 나온다고요.”

-정 회장님이 물러서야 했겠군요.
“시방서대로 하지 않았으니까 방법이 없어요. 뜯고 다시 했지. 그러니까 손해가 누적된 거야. 그런데 에피소드지만 감독관이 미국 사람인데 자꾸만 정주영 회장하고 싸우다가 나중에는 감독관이 쫓겨났다고. 그건 내가 봐도 감독관이 지나치게 한 점이 많았다고요. 왜냐, 한번 사이가 틀어지니까 이 사람들이 우리가 경험이 없고 잘 못한다는 걸 빙자해 우리한테 너무 심하게 군 거예요. 심하게 군 거는 정확하게 보고서를 만들어 IBRD에 올리면 거기에서 심사를 해요. 그래가지고 그 사람이 쫓겨났어요. 우린 잘됐다 했지. 그 후에 우리가 다른 외국 현장에 나갔더니 거기에 그 사람이 감독관으로 나오잖아. 또 만났다고, 허허헝. 그때는 굉장히 반가워하면서 놀라더라고. 태국에서는 ‘이게 무슨 회사냐’ 했는데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회사는 없다면서 자기가 세계은행에다 우수한 회사라고 보고서를 써주겠다고 말이야. 사람 인연이라는 게 그래요, 허헝.”

나중엔 태국 국왕도 공사 걱정

-태국에서 경험한 걸로 국내 고속도로를 만들게 되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그때 우리가 정말 많은 걸 배웠는데, 국제 시방서에 맞는 고속도로라는 게 얼마나 어렵고 까다로운가를 처음 알았어. 수십 번 뜯고 다시 깔고 하면서 그 사람들이 시키는 그대로, 책에 있는 그대로 했더니 비로소 경험이 되고 실력이 향상되고 말이지. 공사가 끝난 다음 해에 우리가 태국 공사로 세계토목 기술평가에서 우수상을 받았다고요. 세계에서 가장 하자가 없는 공사로 말이지, 허허헝. 그게 실적이 돼서 태국 정부가 발주하는 공사도 계속 맡게 되고 호주도 나가게 되고 월남도 연결되고 방금 얘기한 경부고속도로도 하게 되고 그런 거예요. 현대건설이 고속 성장을 하는 계기가 된 거지.”

-522만 달러 공사에 300만 달러의 손실을 봤다는데, 손해의 본질이 경험 미숙 때문이라고만 보십니까?
“그게 사실 미숙한 것도 있었지만 공사 도중에 국왕도 오시고 왕비도 가끔 내려오셨는데, 그럴 정도로 태국 정부가 걱정을 많이 했던 공사라고요.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조건이 너무 열악해 현대가 피해를 많이 봤다, 국왕이 정말 고속도로가 뚫리는 거냐고 물을 정도로, 국왕조차 반신반의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했기 때문에 손실이 더 컸다, 그런 얘기도 된다 그거예요.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데, 내가 거기서 게릴라 습격도 받고 현지인들의 습격도 받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잖아요. 그런 일뿐만 아니라 남태평양 지역은 게릴라도 나오지만 완전히 밀림지대라고. 그러니까 길이라고는 없지. 오솔길도 없다고. 어떤 곳은 늪 지대고 얼마 안 가서는 배를 타고 들어가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산악을 뚫어서 길을 내는 게 아니고 사람이 다닐 수 없는 지역에서 측량부터 하는 거라고. 가다 보면 맹수도 만나고 특히 그 뱀, 태국의 뱀이 무섭잖아요. 그런 걸 다 겪고 헤쳐내면서 했다고. 생각해 보면 그런 악조건인데 그걸 계산에 넣지 않고 입찰가를 적게 써내서 낙찰을 받았다고요. 손해를 보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허허헝. 우리하고 같이 입찰했던 선진국 건설사들은 그걸 다 아니까 위험 비용까지 넣은 거예요. 어쨌든 그 당시에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첫 공사로 상당히 각광을 받은 건 사실이지. 그럼 됐지 뭐, 허헝.”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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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객원기자·작가 leeho5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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