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몰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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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발표 몇 시간 전에 미국 정부에 통보했으며, 사전에 미국과 전혀 상의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송민순 외교부 장관은 8일 오전(미국 시간은 7일 오후)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정상회담이 28일 평양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렸다. 그 직후 국무부 고위 관리는 주미 한국대사관의 고위 관계자와 통화하면서 "놀랄 만한 사태 진전(a surprising development)"이라며 "회담에서 무슨 얘기가 오갈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회담 개최 사실을 통보받고 나서 "정상회담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6자회담에 기여하길 바란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조앤 무어 국무부 부대변인도 "우리는 오랫동안 남북대화를 환영하고 지지해 왔다"고 밝혔다.

◆미국, 환영 속 당혹=미국은 그동안 고위 당국자들을 통해 한국의 남북 정상회담 추진 움직임에 꾸준히 '속도 조절론'을 제기해 왔다. 북한의 비핵화가 가시화할 때까지는 한국 측이 정상회담을 자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는 1년 넘게 공전을 거듭하던 6자회담이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에서 자칫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면 6자회담 로드맵이 망가질 수 있다는 우려에 바탕을 두고 있다.

힐 차관보는 지난달 16일 서울에서 '8월 말 남북 정상회담 추진설'과 관련, "남북관계가 6자회담 과정과 협조적으로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도 지난달 11일 화계사 강연회에서 "남북 간 최고위층의 만남은 평화체제와 비핵화, 관계 정상화 프로세스의 마지막 부분에 이뤄지는 것이 좋다"고 말해 정상회담보다는 비핵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6자회담 헝클어질까 우려=힐 차관보는 5월 14일에도 미국에 온 신기남 국회 정보위원장에게 "남북관계와 6자회담은 같이 가야 한다"며 "남북 정상회담은 필요하면 할 수 있지만 북한이 6자회담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힐 차관보는 또 남북한과 미국과 중국이 참여하는 4국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같은 날 신 위원장을 만난 데니스 와일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도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의 비핵화 이행을 지켜보면서 한.미 간에 시기문제를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들 고위 당국자의 발언은 '미국이 남북 정상회담에 개입할 입장은 아니지만 북한의 비핵화가 가시권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속도조절을 해 달라'는 뜻을 우회적으로 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한국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한과 평화체제 수립을 선언하고, 대북 추가 경제지원 계획을 발표하는 등 6자회담 로드맵을 넘어서는 조치를 쏟아낼 가능성이 크고, 그럴 경우 모처럼 궤도에 진입한 6자회담이 다시 헝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의 각종 지원 약속에 고무된 북한이 영변 원자로 폐쇄에 이어 이행해야 할 불능화 프로세스를 거부하고 버티기 작전으로 나올 가능성을 경계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북 협상에 곱지 않은 시선을 던져온 워싱턴 강경파들이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빼앗아갈 우려마저 있다는 게 이들 당국자의 생각이다.

이 같은 미국의 우려에 대해 한국은 '남북관계 진전을 6자회담의 진전과 병행, 또는 선순환적으로 추진한다'는 말로 입장을 정리해 왔다. 그러나 미국의 의혹을 해소시키기엔 부족한 수준이란 지적을 받아왔다.

미 국무부가 8일 환영 논평을 내면서도 '놀랄 만한 사태 진전'이라고 표현한 데는 여러 차례 신호를 보냈음에도 정상회담을 밀어붙인 노무현 정부에 대한 당혹감이 배어 있다고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말했다.

워싱턴=이상일.강찬호 특파원

◆국방위원장=북한의 최고통치기구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가리킨다. 1998년 9월 북한은 김일성 주석을 '영원한 주석'으로 선언하고, 대신 국방위원장 권한을 대폭 확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실질적인 주석 지위로 올려놓았다. '선군정치' 구호 아래 군 출신을 국방위에 대거 포진시켰다. 이번 정상회담 협상 채널인 김양건 노동당 통전부장은 국방위 참사(실무책임자)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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