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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추적] 11개 키워드로 파헤친다 가짜·진짜 신정아 진실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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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를 발칵 뒤집어 놓은 신정아 씨. 그의 모든 것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진짜 신정아’는 어떤 사람일까? <월간중앙>이 추적한 신씨의 실체를 11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 고향은 경북 청송 한 시골마을… 중학교 진학 위해 상경
■ 삼풍 붕괴 때 살아나며 성격 탈바꿈… 지인에게조차 신변 이야기 안 해…
■ 각계각층에서 채용 요청 봇물 이뤄… 원로 화가 넘어 정치권 인사까지 거론
■ 인맥 동원해 예산 그러모아… 처세술도 일찌감치 깨우쳐…

월간중앙 신정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적어도 미술계에서 극찬받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의 말에 많은 이가 귀를 기울였다. 아니 푹 빠질 정도였다.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으로 발탁된 것은 그 정점이었다. 특히 그의 화려한 외모와 배경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의 주변사람들은 그런 신정아를 자주 말했다. 지금도 그렇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하다. 유명세에 비해 그를 제대로, 많이 아는 이는 없다. 어린 시절 등 과거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나돌지 않는다. 오로지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가짜가 아닌 ‘베일에 쌓인 진짜 신정아’에 쏠리고 있다.

진짜 신정아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월간중앙>이 그의 오빠와 어머니, 그리고 미술계에서 신정아와 가장 오래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단독인터뷰를 통해 파악한 ‘진짜 신정아’는 이러하다.

01 경북 청송 시골마을 출신
안동으로 알려진 것은 오류… 부잣집 2남1녀 중 막내딸

신정아 씨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안동 출신이 아니다. 안동에서 50여 분 거리에 떨어진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이 진짜 고향인 것으로 확인됐다. 진보면은 작은 시골마을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가 어렸을 적 워낙 부잣집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네 주민이 그의 집을 알고 있었다.

그는 초등학생 때까지만 진보면에서 살았다. 당시 진보초등학교를 다녔고 이후 중·고등학교는 모두 서울에서 나왔다.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어머니 이원옥(63) 씨와 함께 상경해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동덕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생 시절에는 학업성적이 우수해 영재들이 들어가는 고등학교(학교명은 익명)에 진학했다.

가족관계는 어머니 이씨와 두 명의 오빠가 있다. 그는 3남매 중 막내딸이다. 아버지는 10여 년 전에 작고했다. 부친은 생전에 주유소와 택시회사를 크게 운영했다. 모아놓은 재산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어머니는 Y어린이집을 운영하며 인근 절에서 생활하고 있다. 큰오빠는 국내 재벌회사 기획실 간부이며, 작은오빠는 안동 S학원 원장이다.

02 팔방미인이었던 소녀 신정아
예능분야 관심 많았으면서도 성적 우수… 어린이회장 맡기도

초등학생 시절 신정아는 학교에서 기악합주반 활동을 했다. 예능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적도 우수했다고 한다. 통솔력이 뛰어나 진보초등학교 어린이회장을 맡았다.

소녀 신정아는 팔방미인이었다. 총명하고, 책임감 강하고, 예의 바른 어린이였다. 동네 어르신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어머니 이씨는 “똑 부러지는 성격에 공부도 잘했다. 특히 어른들에게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아이였다”고 말했다. 안동에서 만난 그의 작은오빠 신기웅 씨는 “어려서부터 똑똑한 아이였다”는 한마디로 동생을 표현했다.

03 개인사는 절대 함구
“신정아 씨는 전혀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신정아 씨의 성장기 과거사는 아직 단 한 줄도 노출된 바 없다. 그의 어린 시절이나 중·고등학교 시절 등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이 때문. 그녀의 사적인 정보 부재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있어봐야 밑도 끝도 없는 추측으로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것뿐이다.

왜일까? 내성적인 그의 성격 탓일까? 물론 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신씨가 사적인 부분은 철저히 함구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의 신상명세나 살아온 이야기는 1997년 10월 금호미술관 아르바이트가 시작점이다. 그리고 그 후 성곡미술관으로 옮겨 가고(2002년)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대학원 교수 임용(2005년), 광주비엔날레 공동 감독 선임(2007년) 등이 거의 전부다.

그와 같은 미술관에 근무했던 모 씨는 “신정아 씨는 전혀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이라며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꽤 가깝게 지냈다던 화가나 기자들도 신씨 개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기는 마찬가지. 사설 미술관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국대나 광주비엔날레 사무국에도 그의 신상을 담은 서류는 전무하다. 관련 서류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예일대 박사 학위 소지 여부는 아직 물음표를 찍어둬야 할 처지다. 동국대 측의 ‘가짜 확인’ 발표와 달리 본인과 가족이 워낙 강한 어조로 기정사실화하고 있어 마지막으로 공권력에 의해 진위를 가리는 작업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04 재력이 엿보이는 외모와 치장
“BMW에 명품 가방, 명품 옷으로 치장… ‘잘사는 집 딸’ 느낌 풍겼다”

짧은 기간이나마 신정아 씨와 직장 동료로 함께 일했던 이들은 그의 ‘호사스러운’ 이미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다름 아닌 신씨가 20대 후반일 당시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몰고 다녔던 외제 고급 승용차(BMW) 때문이다.

승용차와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만 정서상 그런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터다. 시대를 앞서갈 정도로 인식됐던 그의 세련된 외모에 대해서도 입을 모았다. 옷이며, 신발·가방 등이 모두 고가의 명품이었다고 한다.

미술관의 선배였던 한 관계자는 “처음 신정아 씨를 봤을 때 말 그대로 재력이 있어 보였다”며 “BMW에 명품 가방, 명품 옷으로 치장하고 다녔고, 그것을 보고 ‘잘사는 집 딸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고 소회했다. 또 다른 선배 한 사람도 “집이 잘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외모만 보더라도 경제적 여유가 있어 보였고, 어쩌면 그런 점이 윗사람에게 잘 보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신씨는 서울 일대 고급 레스토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미술관으로 지인이 찾아오거나 밖에서 손님을 만나면 늘 그런 곳으로 데려갔다. 비싼 음식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그가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받은 월급은 240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05 국내 미술계 첫발
통역 아르바이트 일로 입문… 금호미술관 거쳐 성곡에서 승승장구

신정아 씨가 직접 말했듯 1997년 9~10월 무렵 서울 사간동에 있는 금호미술관에서 미술 분야의 일을 처음 시작했다. 당시 신씨가 맡았던 일은 전시장 통역 아르바이트였다. 근무기간은 3개월 정도였다.

당시 같이 근무했던 한 큐레이터는 “(1997년) 10월부터 12월까지 ‘호안 미로전’을 개최했는데, 때마침 영어 안내를 할 사람이 필요해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왔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 직후 수석 큐레이터 P씨가 금호미술관장과의 불화로 퇴사하자 아르바이트생이었던 신씨가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로 선임됐다.

한 관계자는 “전문 큐레이터를 쓰면 비용이 많이 들다 보니 미술관 측에서 신씨를 큐레이터로 앉힌 것”이라며 “(신씨) 본인이 미술과 경영을 전공했다고 하니 검증 없이 그냥 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신씨는 그러나 얼마 후 큰 사고를 만났다. 금호미술관에서 기획한 어린이미술전이 화재로 인해 실패하자 신씨와 미술관장 사이에 앙금이 쌓였던 것. 이를 계기로 신씨는 금호미술관을 퇴사하고 성곡미술관으로 이직했다. 이 때부터 신씨는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으로 있던 J씨가 그만두자 신씨는 곧바로 성곡미술관의 유일한 큐레이터인 동시에 학예실장으로 대우받게 된다. 이후 2003년 그는 큐레이터로서 최고의 영예인 월간미술대상 전시기획부문 대상을 받았다.

06 집요하다, 그리고 당차다
성곡미술관으로 옮길 때 신씨는 학예실장 J씨에게 2개월 통사정

신정아 씨는 한마디로 ‘당찬’ 여자였다. 사회 초년생 신씨를 접했던 이들은 예전 황당했던 느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 금호미술관으로 찾아가 이력서를 내밀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들이댔단다. 그 이력서에는 캔자스주립대에서 서양화와 판화를 전공한 후 동 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외국어 구사도 가능하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를 그만두고 성곡미술관으로 옮길 당시 신씨는 학예실장 J씨를 2개월 동안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채용해 줄 것을 통사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신씨는 성곡미술관과 인연을 맺지 못할 뻔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곡미술관의 건립 취지와 행보가 한국현대미술의 발전이었다면 신씨가 큐레이터로서 기획했던 것들이 외국 작가와 명품 작품 전시 유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성곡미술관 측은 신씨에게 “미술관 내규상 신씨가 하는 일이 성격이 다르다”며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신씨는 자신의 주변 인맥을 활용했다.

다시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이의 말이다.

“각계각층의 사람이 찾아와 신씨 채용을 요청해 굉장히 난처했다. 계속해서 미술평론계 실세 등을 보내 관장을 압박하는 바람에 결국 신씨는 성곡미술관에 들어오게 됐다.”

07 치밀하고 대담한 성격
치밀함을 실력으로 승화…그 경력 토대로 대학교수 등 엘리트 코스

신정아 씨의 치밀함은 오히려 이번 사태가 불거지는 단초가 됐다. 자충수를 둔 격이다. 어쨌든 현 시점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그의 승승장구가 주변의 시샘을 불러일으켰고, 각종 의혹을 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씨는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모습을 앞세워 금호미술관 아르바이트생으로 일을 시작했고, 인맥을 두루 활용해 성곡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 치밀함을 실력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그 경력을 토대로 동국대학교 조교수에 발탁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어찌 보면 치밀하다기보다 대담함으로 읽히기에 알맞은 경우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성공의 장벽이 될 수 있었던 금호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P씨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 J씨가 공교롭게도 신씨 입사 후 모두 퇴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 쪽에서 거론하는 신씨의 치밀함이다. 미술관 인사권을 쥐고 있는 관장으로 하여금 빈 자리를 신씨 자신으로 채우도록 하는 일종의 마력(?)을 지닌 인물로 인식하는 이들도 있다.

08 든든한 백그라운드
재계·관계 인사, 중진·원로 작가 등 거론되지만 사실 확인은 불가능

새로운 자리를 꿰찰 때마다 신정아 씨의 곁에는 든든한 후원자들이 있었다. 광주비엔날레 공동 예술감독 발탁 과정에서는 신씨의 유력한 지인들이 등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씨의 후원자들은 누구일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신씨의 지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어떤 압력을 넣는 방식이었을까, 아니면 진정 평소 쌓은 인맥을 동원한 것이었을까?” 이와 관련한 수많은 의문이 쏟아지고 있다. 예상되는 인물을 도식화하는 이들도 있다.

취재 결과 금호미술관에서 성곡미술관으로 옮길 때 도움을 준 신씨의 인맥은 화가·사진작가·언론인 등 10여 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자의든 타의든 분명히 그를 추천한 사람들이다. 그 과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한 인사는 그들의 실명까지 거론했다. 다만 이번 사태의 확대를 우려해 본인과 거론 대상자들의 익명을 당부했다.

여기에 현재 의심을 받는 정치권 인사들과 중진·원로 작가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크게 늘어난다. 신씨의 인맥과 관계 유지의 내막을 일정부분 알고 있는 한 인사 역시 전직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을 언급하며 신씨의 ‘라인’이라고 했다. 당연히 미술 분야에서 실세들이다.

이는 신씨의 채용 결정 과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성곡미술관의 경우 처음 신씨의 이력서를 접하고 우회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혔으나 신씨의 인맥이 가동된 후 관장의 최종 의사결정으로 결국 채용하게 된 점을 보면 의심의 여지는 충분하다. 이로 인해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관전 포인트가 바뀌고 있다. 신씨의 배후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09 펀드레이징의 귀재
대기업과 정부부처 등에서 돈 조달… 미술계와 인연 더 견고하게 만들어

펀드레이징은 신정아 씨가 인정받는 부분이다. 전시회 기획 때 필요한 예산을 그러모으는 데는 선수(?)로 정평 나 있다. 신씨는 예산을 그러모을 때 평소 잘 관리해 왔던 인맥을 동원했다.

신씨는 실제로 2003년 무렵 “기획예산처에 아는 사람이 있다”며 필요한 예산을 타냈다. 일부 국내 대기업으로부터도 자금을 조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최근에도 1억여 원대의 전시 기금을 지원받기도 했다. 이 같은 실적은 곧바로 전문성을 겸비한 실력으로 포장됐다.

그는 이를 통해 미술계와 인연의 고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신망도 두텁게 쌓아 나갔다. 예산 조달을 성사시킬 수 있는 마인드와 실적이 실력 검증을 대신한 것이다. 유력 인사들과의 각별한 네트워크를 전제로 탄탄대로를 달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세련된 외모와 일을 처리해 나가는 재간은 무시할 수 없는 그의 능력이었다.

10 처세술의 대가(?)
우호적 실세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 분명한 선 그었다는 평

신정아 씨는 우호적 실세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맺는 것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 그는 득이 된다 싶은 사람에게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비싼 음식 대접도, 명품 선물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전한다. 게다가 공손하기까지 했다. 특히 원로 화가 등 중진들에게는 이런 그의 태도가 깍듯함으로 보였다. 인심 쓰는 만큼 인정받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우친 모양이다.

미술계 한 인사는 최근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신씨에 대해 “대단히 사교적이고 자신을 세일즈하는 능력을 타고났다”며 칭찬했다. 또 다른 인사는 그를 두고 “키 크고 늘씬한 미인형에다 미술계 실력자나 원로들에게 잘하고 조신하고 상냥해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원로 작가 생일에 예쁜 꽃다발까지 전달하니 누가 예뻐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와 달리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주변인에 대해서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신씨가 몸담았던 미술관에서 그다지 탐탁해 하지 않는 선배 큐레이터들이 떠나고, 대신 그가 관장으로부터 후임으로 지목된 것은 이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11 유창한 말솜씨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 자랑… 삼풍 사고 생존 경험 단골 메뉴

“수다 수준은 아니더라도 막힘 없이 말을 잘한다.”

신씨의 말솜씨를 들어본 사람들은 한마디로 그가 청산유수였다고 말했다. 특히 뭔가 내세우고 싶어할 때나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자랑거리를 늘어놓을 때 그렇다. 유창한 말솜씨를 엿볼 수 있는 경우는 첫째 일류를 지향하고 재력을 드러낼 때다.

그가 성곡미술관에 입사한 이듬해인 2003년, 직원들끼리 간 MT에서 “예일대 박사과정에 있고 논문을 준비 중이다. 주제는 1920년대 (서양미술) 원시주의에 관한 것”이라며 자세하게 설명했다고 MT 참석자는 전했다. 또 여름과 겨울이 되면 으레 “공부하러 간다”며 한 달씩 자리를 비우고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단다. 학력을 알리고픈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내세울 때도 신씨는 열을 올리고는 했다. 삼풍 사고는 그 단골 메뉴다. 그는 직장 동료들 앞에서나 지인들에게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매몰됐다 구조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아비규환 중에도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했다 백화점에 들렀는데 콘크리트 더미 속에 24시간 동안 깔려 있다 구조됐다”며 “원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사고 이후 추진력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영어 구사력에 대해서는 평가가 조금 엇갈린다. 하지만 ‘유창하고 거침없는 영어’ 수준에는 못 미친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지난 7월4일 제7회 광주비엔날레 공동예술감독으로 선임된 신정아 씨가 취재진을 만나 포부를 밝히고 있다.

오흥택_월간중앙 기자(ht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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