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ㆍ과일향 가득한 ‘예쁜 와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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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9면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한국인 아내 박재화씨랑 친절한 일본인 와인 메이커 고지상과의 만남은 며칠 전 와인 시음회에서였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 와인 이야기꽃을 피우며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특히 일본인 고지상의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말솜씨에 좌중이 녹았다.

와인 시음기-메종 루 뒤몽 뫼르소 2003

루 뒤몽(Lou Dumont)의 와인 메이커 고지상의 와인 메이킹 철학은 ‘천ㆍ지ㆍ인’, 즉 하늘과 대지 그리고 사람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루 뒤몽은 아주 아름다운 철학을 지닌 와인이다.

대화가 오가면서 필자가 조금 난감한 질문을 던졌다.

-보르도는 일반적으로 와인 메이킹으로 빈티지에 대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데, 부르고뉴는 그러기가 매우 힘이 든다고 합니다. 당신은 빈티지에 대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나요?

“저는 와인을 만들 때 빈티지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빈티지는 좋은 포도를 가지고 자연 그대로 최대한 좋은 와인이 나오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는 거죠. 자식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과 똑같죠. 모든 자식이 잘 커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힘든 빈티지가 있으며 그 빈티지에 맞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와인을 만듭니다.”

고지상의 설명을 듣는 순간, 필자도 빈티지를 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다. 저렇게 정성을 들여가며 모든 빈티지를 그 빈티지에 맞게 잘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 앞으로 좋은 빈티지는 좋은 빈티지대로, 어려운 빈티지는 어려운 빈티지대로 장점을 보려고 노력하자고 결심했다.

2003년 여름은 가혹할 정도로 더운 날씨였다. 열사병에 걸려 돌아가신 어르신들이 있을 정도로 프랑스는 뜨거웠다. 하지만 이처럼 일조량이 풍부한 날씨는 좋은 포도를 생산하기에 최상의 조건이 된다. 루 뒤몽의 뫼르소(Meursault) 2003은 이런 빈티지의 장점을 이용해서 매우 잘 만들어진 와인이다. 일반적으로 뫼르소는 매우 남성적인 느낌의 와인. 하지만 루 뒤몽의 뫼르소는 섬세함이 돋보였다. 병을 따서 잔에 따르자마자 올라오는 은은하고 섬세한 꽃향기와 풍부한 과일향이 아름답다.

플라워, 파인애플, 피치, 오크, 버터, 스카치 등 다양한 향기들이 하늘하늘 피어오르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복합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의 애시디티와 제법 길이감이 느껴지는 피니시, 그리고 좋은 밸런스, 노즈나 팔레트 모두 은은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지배적이다.

무게감이 조금 떨어지는 것이 흠이지만 매우 예쁘게 잘 만들어진 와인이라는 것이 내 평가다. 아기 다다시 남매는 이 포도주를 마시고 빈센트 반 고흐의 ‘꽃이 핀 아몬드 나무’를 떠올렸다지만, 나는 라울 뒤피의 수채화를 연상했다. 이준혁(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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