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는 상공 날았다…55년 한반도 지킨 '팬텀' 고별비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오늘 하늘은 '세븐 클리어(seven clear)'다.”
지난 9일 경기도 수원시 제10전투비행단에서 한 공군 장교가 구름 한 점 없는 상공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7마일(약 11㎞) 앞까지 내다보일 정도로 시야가 좋다는 얘기였다. 조종사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비행 환경인 셈이다.

공군은 12일 '필승편대' F-4E 팬텀 4대가 49년 만의 국토순례 비행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9일 팬텀 필승편대가 국토순례 비행 중 영덕풍력발전단지 상공을 지나는 모습. 사진 공군

공군은 12일 '필승편대' F-4E 팬텀 4대가 49년 만의 국토순례 비행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9일 팬텀 필승편대가 국토순례 비행 중 영덕풍력발전단지 상공을 지나는 모습. 사진 공군

공군은 이날 F-4E '팬텀' 전투기의 고별 국토 순례 비행을 진행했다. 수원을 떠나 대구에 착륙한 뒤 다시 수원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다음 달 7일 공식 퇴역식을 앞두고 한반도 주요 영공을 둘러본다는 의미가 담겼다.

공군 팬텀기의 역사는 1969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자 당시 미국이 군사원조로 F-4D 6대를 지원했다. 미군을 제외하곤 영국·이란에 이어 세 번째 도입이었다. 팬텀이 세계 최강의 기종으로 평가받던 시절이었다. 1975년 F-4E 5대를 추가로 들일 땐, 국민이 십시일반 모은 방위성금 163억원 중 71억원이 투입됐다.

한때 최대 190대에 달했던 한국의 팬텀 계열 전투기는 순차적으로 퇴역해 지금은 F-4E가 10대 남짓 운용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5년 F-4D 5대에 붙인 ‘필승편대’라는 이름은 제153전투비행대대 소속의 마지막 남은 F-4E 4기 편대로 이어졌다. 80년대 중반 F-4E 조종사로 근무한 장영익 예비역 공군 준장(공사 31기)은 “우리나라 안보에 너무 많은 수고를 했다”며 “한마디로 혹사당한 비행기”라고 말했다.

팬텀은 F-15 전투기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보기 드문 복좌형 전투기였다. 무기통제사로 불리는 후방석 조종사는 ▶레이더 운용 ▶좌표 입력 ▶공대지 레이저 유도 폭탄(LGB) 타켓팅 등 무장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팬텀 후방석 조종사로 830시간을 비행한 이성진 대구 제11전투비행단 부단장(대령)은 “공대지 미사일 팝아이를 비롯해 최대 8,480kg이라는 어머어마한 무장을 탑재할 수 있었다"며 "'팬텀이 떴다' 하면 북한이 도깨비 같은 위용에 짓눌려 아예 비행기 자체를 띄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팬텀의 별칭이 ‘하늘의 도깨비’인 이유다.

공군은 12일 '필승편대' F-4E 팬텀 4대가 49년 만의 국토순례 비행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9일 팬텀 필승편대가 국토순례 비행 중 삼천포 상공을 지나는 모습. 공군

공군은 12일 '필승편대' F-4E 팬텀 4대가 49년 만의 국토순례 비행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9일 팬텀 필승편대가 국토순례 비행 중 삼천포 상공을 지나는 모습. 공군

이날 오전 10시 정각 ‘필승 편대’ 고별 비행의 막이 올랐다. 이륙 후 편대는 핑거팁 대형(손가락을 붙였을 때 검지부터 소지까지의 삼각형 모양)을 유지하면서 동해로 향했다. 동해는 냉전 시기 팬텀이 옛소련 전력과 맞섰던 장소다. 1983년과 84년 각각 TU-16과 TU-95 폭격기를, 84년 핵잠수함을 차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1998년 2월엔 러시아 IL-20 정찰기에 대한 전술 조치도 했다.

필승 편대는 포항·울산·부산·거제 등 경제 발전의 전초기지였던 주요 도시들을 비행했다. 이후 대구 제11전투비행단에 착륙해 기름을 채우고 다시 날아올랐다. 대구 기지는 한국 최초의 팬텀 비행대대가 창설된 곳이다. 2005년 도입된 F-15K 전투기가 공대지 타격 역할을 물려받기 전까지 대구는 줄곧 팬텀의 주기지였다.

지난 12일 팬텀과 KF-21 편대 비행 모습. 공군

지난 12일 팬텀과 KF-21 편대 비행 모습. 공군

이날 팬텀 비행에는 시제 비행 중인 한국형 전투기 KF-21 2기도 합류해 눈길을 끌었다. KF-21은 경남 합천에서 사천을 거쳐 전남 고흥까지 약 20분간 함께 날다가 이탈했다.

이후 팬텀 편대는 국토 최서남단 가거도(소흑산도)를 향했다. 팬텀은 1971년 소흑산도에 출현한 간첩선을 격침하는 작전에서 활약했다. 가거도에서 서해를 따라 북상한 팬텀 편대는 새만금 방조제를 지나 군산 앞바다에서 선회한 뒤 수원 기지에 착륙했다.

퇴역한 팬텀은 전국 곳곳에 전시될 예정이다. 일부 퇴역기는 공군 기지 활주로 주변에 배치해 북한군의 유도탄이나 각종 탐지 장비를 교란하기 위한 '디코이' 역할을 맡는다.

이날 팬텀 비행에 참가한 박종헌 소령은 “불멸의 도깨비 팬텀은 퇴역 뒤에도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