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싸움에 '한대' 맞았다…삼성-TSMC 서로의 구원자 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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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만 ‘미·중 반도체 전쟁’ 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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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무역은 죽었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TSMC 창업자 모리스 창 박사의 예언(2022년)은 이미 현실이다. 미국-중국 기술 전쟁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둘로 쪼갰고, 반도체 제조 강국인 한국과 대만은 미·중 사이에 끼어 파닥이는 새우 신세다. 그간 치열하게 반도체 삼국지를 써온 ‘한국-대만-일본’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새로운 협력을 모색 중이다. 지난달 중앙일보와 만난 양광레이 국립 대만대 교수(전 TSMC R&D 시니어 디렉터)는 “대만 회사들은 한국을 강하게 경계한다”면서도 “이건 ‘제로섬’ 게임이 아니므로 메모리-로직에서부터 양국 간 협력 논의를 시작할 때”라고 말했다. 삼성과 TSMC, 한국과 대만이 경쟁을 넘어 ‘손잡을 결심’을 하는 건 과연 필요할까, 아니 가능은 할까. 지난달 22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국제 포럼’을 중심으로 반도체 삼국의 물밑 기류를 살펴봤다.

반도체 삼국지, 세계화가 끝난 후에

글로벌 반도체 분업 구조가 흔들린다. ‘중국의 시장’을 빼고, ‘미국의 제조’를 더해서 첨단 반도체 생태계를 재편하라니, ‘백종원 할아버지’가 와도 짜기 어려운 레시피다. 자유무역의 축복 속에 커온 한·일·대만 삼국은 조각 난 세계에서 눈치 게임을 시작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 40%, SK하이닉스는 D램 40%와 낸드 20% 정도를 중국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미국은 ‘중국에 노후 반도체 장비도 팔지 마라’ 하고, 중국은 ‘투자 더 늘리라’ 하니, 곤란한 상황이다.

대만도 쉽지 않다. 제이슨 휴 하버드 정책대학원 선임연구원은 “대만은 첨단 제품 공급망을 중국에서 이전하느라 천문학적 비용과 고통을 겪었고, TSMC 매출의 13%를 차지하는 화웨이가 미국 제재 대상이 됐을 때(2020년) 대만 내 일자리에도 영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소부장 강국인 일본은 미국의 대중 제재에 있어 중요 협력국이지만, 속으로 불만이 쌓여간다. 스즈키 가즈토 일본 국제문화회관 지경학연구소장(도쿄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은 포럼에서 “트럼프 재선 시 대중 수출 규제가 줄지는 않을 텐데, 이때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을 곳은 일본 (소부장) 기업”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우리(3개국)가 미국의 정책에 끌려다니지 말고 함께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TSMC는 왜 구원이 필요한가

AI 반도체를 장악한 엔비디아도, 아직은 미미한 추격자 AMD도, 하반기 AI 아이폰을 내놓는다는 애플도, 첨단 반도체 물량을 죄다 TSMC에 맡긴다. TSMC에 무슨 걱정이 있을까 싶지만, 대만이라는 둥지의 한계가 명확하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전 세계가 대만산 반도체를 필요로 하기에 대만은 파괴될 수 없다는 게 ‘실리콘 쉴드’ 논리다. 그러나 미국·유럽의 ‘자국 내 반도체 제조’ 기조가 강화되면서 방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크 리우 TSMC 회장은 지난해 NYT 인터뷰에서 “중국이 반도체 때문에 대만을 침공하지는 않겠지만, 반도체 때문에 대만을 침공 안 할 것도 아니다”며 실리콘 쉴드를 부정했다.

대만은 최신 반도체 공정만은 자국 내에 두고 싶어 한다. 지난달 대만 국가발전위원회(NDC)는 연내 대만에 TSMC 2㎚(나노미터·1㎚=10억분의 1m) 팹 등 10여 개 공장을 더 짓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땅은 내 맘 같지 않다. 대만은 에너지원 98%를 수입에 의존하는 데다 탈원전 정책으로 전력난이 심각하다. 지난달 전기요금을 인상했는데 TSMC의 부담은 25%나 늘었다. 대만 국방부 산하 국방안보연구소(INDSR) 밍치 첸 소장은 포럼에서 “모든 반도체 생산을 유지하는 게 대만의 환경에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해외로 다각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동아시아 특유의 유교적 제조 역량은 ‘가성비’를 잃어가는 중이다. 2022년 대만과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각각 0.87과 0.78로, 대만 역시 저출산이 심각하다. 인력이 부족할 뿐 아니라, 웬만해선 이직 않고 장시간 근무를 견디는 문화도 옅어진다.

대만과 일본, 찰떡이라기엔 한끝이 모자라

대만과 일본은 ‘반도체 밀월’ 중이다. 일본 정부가 투자금 절반(약 4조3000억원)을 댄 TSMC 구마모토 제1공장에 이어, 보조금 6조5000억원을 더 붓는 제2공장도 계획 중이다. ‘제조의 대만’과 ‘소재의 일본’이 찰떡인 건 사실이지만, 둘만으로 넘기 어려운 장벽도 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우선 한동안 인력 양성이 끊겼던 일본 반도체 산업엔 첨단 공정에 투입할 엔지니어가 없다. 현재 인력은 죄다 50대 이상이다. 아키라 이가타 도쿄대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RCAST) 디렉터는 “(일본 반도체 산업에) 투입되는 자금과 실제 활용할 수 있는 인재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미세 공정인 반도체 특성상 지진 등으로 라인이 중단되면 손실이 막대한데, 일본은 대만보다 자연재해에 더 취약하다는 점도 문제다. 일본은 2016년 구마모토 지진과 2022년 도호쿠 지진 당시 각각 소니와 르네사스 반도체 공장이 멈췄고, 대만도 2016년 가오슝 지진과 최근 화롄 지진 때 TSMC 공장이 가동을 중단했다.

또, 일본은 한국·대만 같은 지리적 집적(集積) 효과가 떨어진다.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최북단 홋카이도부터 최남단 규슈까지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삼성과 TSMC는 만날 수 있을까

반도체는 한국·대만의 주력 산업이고, 삼성·TSMC 같은 기업은 조금만 움직여도 ‘기둥뿌리 빼 가냐’ 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내 집안 위주에서 벗어나 시야를 넓혀야만 하는 기로에 섰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대만과 일본 모두 저출산이라 해외 인력 활용과 디지털 전환이 급하지만, 이들 국가의 국제화·디지털화는 한국만 못하다. 양광레이 교수는 “대만 기업은 아직 해외 인재를 제대로 활용할 줄 몰라, 저임금 노동력을 투입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또한 “일본은 소프트웨어와 사용자 경험, 디지털 마인드가 약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삼국지』의 저자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부 교수는 “대만 산업계와 교류해 보니, 이들은 한국의 통신·양자컴퓨터·AI 분야 선진성을 인정하며 협력을 원한다”고 말했다.

양국의 문화적 접점은 유리한 요소다. 전 세계에 TSMC 오란 곳은 많다. 그러나 포럼에서 우정중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 주임위원(장관급) 등 대만 연사들은 “같은 생각을 가진 나라(like-minded country)끼리의 협력”을 강조했다. 대만 밖으로 꼭 나가야 한다면 체제·문화에 동질성이 있는 일본·한국을 우선 고려한다는 얘기다.

만약, 한국과 대만이 협력한다면 출발은 어디일까. 전문가들은 AI 반도체 부문 R&D일 거라고 내다본다. 유럽의 R&D 거점인 아이멕(IMEC)과 유사한 ‘아시안 IMEC’ 설립도 제시된다. 권석준 교수는 포럼에서 “한국·대만·일본이 개방형 R&D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며 “TSMC·삼성· SK하이닉스 등 회사와 대학, 국립 연구소 등이 참여하는 R&D 협력체”를 제안했다. 벨기에·프랑스·네덜란드 3국이 설립한 유럽 종합반도체 연구소 IMEC는 ASML의 차세대 극자외선 노광장비 개발과 테스트를 전담한다. 이처럼 3국이 새로운 AI 메모리 반도체 등에서 표준을 만들어 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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