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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미씨, 첫 우수직원 됐다…출퇴근 3시간 줄이자 일어난 일[출퇴근지옥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회 문제가 된 출퇴근지옥

중앙일보는 서울시의 통신기지국 빅데이터인 ‘서울 생활이동 데이터’를 자체 분석해 출근시간대(오전 7~9시) 유입인구가 많은 ‘출근 1번지’ 6개 동(서울 여의동·역삼동·종로동·가산동·명동·서초동)을 선정했습니다. 이후 출근 1번지로 출근하는 인구가 일정 수 이상인 서울·경기·인천의 행정동을 추린 뒤 이 중 통근시간이 가장 긴 곳에 사는 ‘장거리 지역 통근자’와 통근 인구가 가장 많은 곳에 사는 ‘최다 이동 지역 통근자’ 12명을 동행·심층 인터뷰했습니다. 이를 통해 통근거리가 규정하는 이들의 삶을 ①삶의질 ②가족관계 ③건강 ④업무성과 ⑤경제적 상황 등 5가지 측면에서 따져봤습니다.

 지난 6월 30일 오후 6시 서울 강남역 인근 버스 정류장의 퇴근 인파 모습. 신씨는 이 같은 인파를 피하기 위해 차라리 늦은 퇴근을 선택하는 날이 많다. 김홍범 기자

지난 6월 30일 오후 6시 서울 강남역 인근 버스 정류장의 퇴근 인파 모습. 신씨는 이 같은 인파를 피하기 위해 차라리 늦은 퇴근을 선택하는 날이 많다. 김홍범 기자

출퇴근지옥⑤ : 출퇴근 거리와 업무 효율 

화성 동탄신도시에서 만난 변리사 신모(39)씨는 서울 역삼동까지 편도 1시간 40분이 넘는 통근길에 지쳐가고 있었다. 매일 약 85㎞. 다른 장거리 통근자들처럼 신씨 역시 피로를 호소했지만, 정작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건 ‘불안감’이다. “절대거리가 워낙 멀다 보니 출근길에 변수에 많이 노출되고, 정시성도 떨어진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니 늘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6월 30일 오전 7시30분 버스에 탑승한 신씨는 “버스는 정시성이 부족한 게 문제”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6001번 버스를 타고 역삼동 사무실까지는 1시간30분 정도가 걸린 이 날 신씨는 “운이 좋았다”고 되뇌었다. 서울행 전철이 없는 동탄에서 그가 버스를 타는 건 경부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를 이용할 수 있어 자가용보다는 그나마 변수가 적기 때문이다. 부인의 직장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하다 보니 이사는 언감생심이다.

지난 6월 30일 오후 6시 30분쯤 강남역에서 동탄으로 향하는 6001번 버스 옆으로 승용차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동탄 시민 다수가 전용차로로 다니는 버스로 출근한다. 김홍범 기자

지난 6월 30일 오후 6시 30분쯤 강남역에서 동탄으로 향하는 6001번 버스 옆으로 승용차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동탄 시민 다수가 전용차로로 다니는 버스로 출근한다. 김홍범 기자

신씨가 가장 불안한 건 월요일 아침이다. 한 달에 1~2번은 인파로 가득 찬 버스를 보내고 3~4번째로 오는 차량에 탑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비 오는 날엔 대기하는 동안 비를 맞아서 출근 전부터 지친다”며 “클라이언트와의 약속은 절대로 늦지 않는다는 나름의 철칙 때문에 동탄으로 이사 온 뒤에는 최소 30분은 남기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버릇이 생겼다. 약속 2시간을 남기고도 불안해 약속 시각을 미룰 때도 있다”고 말했다.

출근길 신씨는 기록적인 폭우로 강남역 일대가 침수됐던 지난해 8월 8일 이야기를 꺼냈다.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빗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그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오후 11시까지 업무를 처리했지만 도저히 귀가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씨는 “근처 호텔 등 숙박시설도 알아봤지만 남은 방이 없었다”고 했다. 자정이 돼서야 물에 반쯤 잠긴 강남역에서 그는 겨우 동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집에 도착한 시간이 도대체 몇 시였는지 알아요? 집도 아니고 동탄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3시였습니다. 다음날 출근은 어떻게 해요.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런 경우들이 생기면 내가 왜 여기에 사나 하는 한탄이 절로 나오는 거죠.”

기록적인 폭우가 내린 지난해 8월 8일 서울 강남역 사거리 교대 방향 도로가 침수돼 있다. 당시 많은 장거리 통근자들은 퇴근길이 막혀 불안에 떨어야 했다. 신씨의 경우 다음날 오전 3시에야 집이 있는 동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뉴스1

기록적인 폭우가 내린 지난해 8월 8일 서울 강남역 사거리 교대 방향 도로가 침수돼 있다. 당시 많은 장거리 통근자들은 퇴근길이 막혀 불안에 떨어야 했다. 신씨의 경우 다음날 오전 3시에야 집이 있는 동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뉴스1

출퇴근 길 자체가 거대한 스트레스가 되면서 업무 시간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어렵다는 게 신씨의 토로다. 그는 “새로운 기술이 뭔지 돋보이게 출원서를 쓰려면 고도로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동료 80%가량은 아침 일찍 나와 100m 달리기를 하듯 초집중 상태로 일한다”며 “(나는) 출퇴근 시간이 길고 변수도 많아 그럴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저녁 시간을 활용한다. 하지만 집중력이 떨어지고 늘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고 말했다. 붐비는 시간을 피하다 보니 저녁 업무 시간이 자연스레 늘어났고, 결국 시간 대비 일의 효율이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침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기면 회사 동료에게 부탁하는 일도 일 년에 1~2번은 생긴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반면에 관악구 청룡동에서 역삼동으로 출근하는 양소미(31)씨는 출퇴근 시간을 바꾸면서 업무효율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는 경험을 했다. 그는 2년 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김포시 구래동에서 왕복 5시간 동안 총 6번의 환승을 거쳐 회사를 오갔다. 지금은 집 문을 나설 때부터 시간을 재도 회사까지 채 50분이 걸리지 않는다.

인터넷은행 CX(고객 상담 업무) 부문에서 일하는 양씨는 매일 응대하는 고객의 수가 정량적으로 나타나는 업무를 맡고 있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업무 효율 차이가 숫자로 드러난다. 구래동에서 출근하던 시절 하루 평균 60~70건의 상담을 힘들게 처리했지만, 최근에는 100건 이상 상담해 당일 최다 업무 달성자인 ‘오최콜’(오늘의 최고 콜)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110콜로 가장 많은 콜을 받은 날도 관악구로 이사한 이후였다. 특히 지난해 초 이사를 한 직후에는 며칠 연속 ‘오최콜’을 받는 등 10회 이상 우수한 근무 성적을 냈다. 이사 전엔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경험이다.

고객 상담 업무를 하는 양소미(31)씨는 김포에서 관악구 청룡동으로 이사한 이후, '오최콜(오늘의 최고 콜)'을 연이어 기록하는 등 업무 성과가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달 4일 양소미씨가 출근하는 모습. 김민정 기자

고객 상담 업무를 하는 양소미(31)씨는 김포에서 관악구 청룡동으로 이사한 이후, '오최콜(오늘의 최고 콜)'을 연이어 기록하는 등 업무 성과가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달 4일 양소미씨가 출근하는 모습. 김민정 기자

양씨는 “출퇴근 거리를 줄이기 전엔 오전 9시 출근을 위해 5시에 일어나 준비를 한 뒤 집을 나서는 삶을 살았다”고 했다. 구래동 집에서 가까운 구래역에서 김포골드라인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대기 시간만 15분, 다시 김포공항역에서 인파를 밀어내며 9호선에 탑승하기 위한 시간이 15분이었다. 전쟁 같은 출근길은 고속터미널역에서 3호선으로, 교대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 뒤 다시 역삼역에 닿아야만 끝이 났다.

그는 “자리다툼으로 언성을 높이고, 한 번은 결국 같은 자리에 두 명이 끼어 앉아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봤다. 항상 마음이 힘들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하루 4~5시간밖에 못 잤다. 남는 시간은 무조건 잠을 보충하는 데 썼다”며 “퇴근길 지하철·버스에서 눈물도 여러 번 흘렸다”고도 했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이 단축되면서 양씨는 “업무를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여유도 생겼다”고 말했다. 그 결과 양씨는 사내 고객 응대 매뉴얼 개선팀 책임자가 됐다. 출퇴근이 힘들어도 결혼 자금 준비를 하려면 본가에 머무는 게 나을 것 같아 이사를 주저했다던 그는 “지쳐서 하고 싶은 일을 못 할 때 속상했다. 그래서 돈보다는 시간과 체력을 더 아껴야겠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지금의 양씨는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할 뿐 아니라, 하루에 1~2시간은 꼭 노란 조명 아래서 ‘책 읽기 좋은 음악’ 목록을 재생해 두고 독서를 한다. 또 장거리 출퇴근 때와 달리 평일 날 친구들도 만날 수 있어 주말은 온전히 자기 계발에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본가에서 나와 독립했지만, 가족 간 관계도 오히려 더 화목해졌다. 회사에서 생긴 일을 설명할 체력도 없었던 전과 달리 전화로 이것저것 설명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지난 3월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대졸 신규입직자 846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통근이 직장 만족도 및 이직의향에 미치는 영향(배호중)’ 연구에 따르면 통근 시간에 90분 이상을 사용하는 직장인은 20분 미만을 사용하는 직장인에 비해 이직 의향이 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연구는 ‘통근에 오랜 시간이 소요될수록 직장 만족도가 낮았으며, 직장과의 거리가 멀수록 직장 만족도가 낮을 가능성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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