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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놓치면 끝" 비장한 아침…남들 운동할 때, 난 살려고 뛴다 [출퇴근지옥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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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제가 된 출퇴근지옥

중앙일보는 서울시의 통신기지국 빅데이터인 ‘서울 생활이동 데이터’를 자체 분석해 출근시간대(오전 7~9시) 유입인구가 많은 ‘출근 1번지’ 6개 동(서울 여의동·역삼동·종로동·가산동·명동·서초동)을 선정했습니다. 이후 출근 1번지로 출근하는 인구가 일정 수 이상인 서울·경기·인천의 행정동을 추린 뒤 이 중 통근시간이 가장 긴 곳에 사는 ‘장거리 지역 통근자’와 통근 인구가 가장 많은 곳에 사는 ‘최다 이동 지역 통근자’ 12명을 동행·심층 인터뷰했습니다. 이를 통해 통근거리가 규정하는 이들의 삶을 ①삶의질 ②가족관계 ③건강 ④업무성과 ⑤경제적 상황 등 5가지 측면에서 따져봤습니다.

출퇴근지옥② : 극과극 삶의질

“좀 뛰어야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직장인 심은주(42)씨가 출근길 동행에 나선 취재진에게 물었다.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사는 심씨의 하루는 매일 오전 5시20분쯤 시작된다. 심씨는 코로나19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며 자주 우울해진 탓에 언니 집에 들어와 살게 됐지만, 저녁 때만 언니와 초등학생 조카를 만날 수 있다. ‘장거리 통근자’라서다. 심씨는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캄캄한 집안을 조용하고 분주하게 오갔다.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에 사는 심은주(42)씨는 출근길 지하철 자리 한 칸을 차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지난 6월 28일 심씨는 오전 6시20분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김민정 기자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에 사는 심은주(42)씨는 출근길 지하철 자리 한 칸을 차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지난 6월 28일 심씨는 오전 6시20분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김민정 기자

6시20분 현관문을 나선 심씨의 머리카락은 축축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났지만, 출근 시간인 8시에 맞추려면 어깨 아래에 닿는 긴 머리를 완전히 말릴 여유가 없다. 이날도 물기를 남긴 채 헤어드라이어 플러그를 뽑아야 했다. 심씨의 직장은 서초3동 예술의 전당이다. 경기도 고양시와 맞닿은 서울 서북쪽 끝에서 남쪽 끝자락의 서초구까지 직선거리로만 21㎞ 이상 이동해야 한다.

그의 출근 동선은 거의 분 단위로 짜여 있다. 정해진 때 정해진 곳에 이르지 못하면 차질이 생긴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그나마 운이 좋은 날은 내내 서서 가는 데 그치지만, 운이 나쁘면 녹초가 된 채 지각까지 하게 된다. 이 때문에 집과 버스, 지하철 사이의 틈은 모두 심씨의 달리기로 채워진다. 원피스나 굽이 있는 구두 대신 검은색 바지에 가벼운 샌들을 신고 집을 나선 그는 “30분에 오는 버스를 꼭 타야 한다”며 발길을 재촉했다. 목표로 한 버스에 오르고 10분쯤 흐른 무렵, 구파발역이 두 정거장 앞으로 다가오자 이번엔 “내리자마자 좀 뛰어야 한다”는 말을 다시 건넸다. ‘준비하라’는 표정이었다. 잠시 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심씨는 지하철 출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심씨의 달리는 모습을 흘깃 보던 한 여성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빈 좌석 찾아 매일 달리기… “좋아하던 운동은 포기”

심씨가 출근 때 이용하는 구파발역. 3호선 열차 앞 승강장에선 자리에 앉아 가기 위해 사람이 한 명이라도 적게 서 있는 출입구를 찾는 사람들 간의 신경전이 아침마다 벌어진다. 김민정 기자

심씨가 출근 때 이용하는 구파발역. 3호선 열차 앞 승강장에선 자리에 앉아 가기 위해 사람이 한 명이라도 적게 서 있는 출입구를 찾는 사람들 간의 신경전이 아침마다 벌어진다. 김민정 기자

“이렇게 뛰어도 어떨 때는 못 앉아요. 줄도 잘 서야 하고. 엄청 치열하거든요.” 승강장에 도착해 숨을 몰아쉰 심씨는 이날 다행히 자리를 찾아 앉았고, 덕분에 45분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그가 꺼내 든 건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란 제목의 시나리오 작법서였다. 그는 “대학 때 영화를 전공해서 시나리오 집필에 관심이 많다. 퇴근하면 조금씩 쓰려고 마음먹었는데, 집에 가면 녹초가 되니까 스트레칭 정도만 하고 잠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직 전까진 출근 시간이 30분 정도였다. 심씨는 “그땐 아침에 자전거를 타거나 조깅을 했고, 퇴근 후에도 산책하거나 책 읽는 걸 좋아했다”며 “지금은 같은 시각에 일어나고 같은 시각에 퇴근해도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출퇴근에 쓰는 시간 자체도 길지만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했다.

심씨가 자리에 앉은 뒤 내릴 때까지, 객실엔 단 한 번도 빈자리가 나지 않았다. 한 남성은 눈을 감은 채 30분 넘게 기둥에 매달려 이동했다. 하차까지 2개 역을 남긴 시점, 심씨가 책을 덮으며 다시 ‘준비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옷매무새를 살피고, 팔과 다리를 가볍게 뻗는 등 간단히 몸을 풀고는 “내려서 15분 정도 거린데, 늦으면 뛰어야 한다. 원래 지금 회사 앞 카페에 커피를 주문하면 딱 시간이 맞는데, 회사 동료가 대신 사오기로 해서 오늘은 그나마 걸어도 되겠다”고 말했다.

아침잠이 없는 오명진(39)씨는 오전 5시에 일어나 운동이나 독서로 아침 시간을 보낸 후 출근을 준비한다. 그는 집에서 15분만 걸으면 직장이 나온다. 최서인 기자

아침잠이 없는 오명진(39)씨는 오전 5시에 일어나 운동이나 독서로 아침 시간을 보낸 후 출근을 준비한다. 그는 집에서 15분만 걸으면 직장이 나온다. 최서인 기자

성별·나이, 직장 위치도 비슷하지만…전혀 다른 아침

서초구 서초1동에 사는 오명진(39)씨의 직장도 심씨와 같은 서초3동에 있다. 오씨도 심씨처럼 오전 5시 무렵 일어나고, 일주일에 3~4번 달리기를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달리기는 목적지도 의미도 전혀 달랐다. 오씨의 집과 직장은 도보 15분 거리인 1.3㎞ 떨어져 있고, 업무 시작 시각은 오전 9시다. 오씨에겐 매일 아침 심씨보다 2시간 정도의 여유가 더 주어진다.

지난달 25일 오전 5시20분쯤, 막 잠에서 깬 오씨가 운동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회사가 아닌 인근 서울교대 운동장이었다. 오씨는 이곳에서 약 1시간가량 스트레칭과 달리기를 했다. 빈 좌석 쟁탈이란 목적을 위해 몸을 풀고 달리는 심씨와 달리, 오씨의 목적은 건강과 다이어트였다. 그는 “야근이나 회식은 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건강을 챙기려면 대신 아침에 운동해야 한다. 운동 시작 전엔 오늘 할 일을 생각하면서 글도 끄적이고, 책이나 영화를 보다 떠오르는 게 있으면 수필 같은 것도 쓰곤 한다”고 했다.

운동을 마치고 6시30분쯤 집으로 돌아간 오씨는 1시간에 걸쳐 샤워 및 화장을 하고 출근 준비를 완전히 마쳤다. 오씨 역시 아침 식사는 하지 않지만, 시간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체중 조절을 위해서였다. 대신 책을 읽을 때가 많다. 그는 “독서 구독 서비스를 신청해 놓고 닥치는 대로 읽는 편이다. 1주일에 1~2권 정도는 꾸준히 읽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씨가 다시 집을 나선 건 8시9분이었다. 빌라와 상가들이 밀집한 골목길을 10여분 걸어 대로로 나오니 이미 길 건너편에 오씨의 회사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부턴 사거리에 놓인 횡단보도 2번을 더 건너면 출근길이 끝난다. 버스나 지하철 도착 시각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꺼낼 일도 없었다. 정문을 통과한 시간은 정확히 15분이 지난 8시24분. 업무 시작 시각을 50분 정도 남기고 집을 나섰지만, 회사에 도착하고도 아직 36분이 남았다.

6년 전 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며 30분 정도 버스로 출퇴근했다는 오씨는 2018년 충남 천안으로 발령 나 3년 간 일하면서 직주근접의 단맛을 봤다. 당시 직장과 숙소는 도보로 7분, 자차로 1~2분 거리였다. 이후 ‘출퇴근 거리는 삶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회사에 갈 때도 별로 긴 거리가 아니었지만, 아주 괴로웠어요. 절대적인 시간은 문제가 아니에요. 워낙 막히는 구간인 데다 사람도 너무 많았어요. 가다 서기를 반복하니 몸도 피곤하고,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죠.”

“통근시간 길어지면 삶의 만족도 하락”

퇴근은 심씨가 오씨보다 1시간 빠르지만, 곧장 집으로 향해도 더 늦게 일을 마친 오씨보다 먼저 집에 닿을 순 없다. 오씨는 야근과 회식이 잦은 편이라 오후 9~10시에 귀가할 때도 더러 있지만, 집에 도착해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확보할 수 있다. 퇴근이 늦어져도 택시비 부담은 없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반면 심씨는 ‘칼퇴근’과 동시에 집으로 향해야만 잠시나마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다. 야근 때문에 1~2시간만 퇴근이 늦어지면 ‘해야 할 일’만 처리해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씻고 저녁을 먹거나, 맞벌이하는 언니 부부를 대신해 조카를 돌보는 일 등이다. “집까지 오면 기력이 없어서 별다른 걸 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회사에서 배려해 주셔서 회식 때도 8시쯤엔 일어나는데, 그래도 집에 오면 10시고 바로 잠들어도 6시간쯤 뒤에 일어나야 해요.” 심씨는 할증 전에도 3만원 이상 요금이 나오는 탓에. 택시를 탈 일 자체를 만든 적이 없다고 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통근시간이 주관적 삶의 만족도에 미치는 효과 및 통근시간 가치 분석’(전혜란, 2020)에 따르면, 모든 가구 유형에서 통근 시간이 길어질수록 삶의 만족도는 하락한다. 경기도민 2만여명을 조사해 발표한 ‘행복과 통근역설’(진은애ㆍ진장익, 2017) 역시 통근시간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행복도가 떨어진다는 결과를 내놨다. ‘일정 수준까지는 주거나 고용 측면에서 보상이 이뤄져 행복지수가 증가하지만, 극심한 교통체증이나 혼잡으로 인한 통근시간 증가는 피로를 누적시키고 다른 여가에 대한 기회를 제한해 행복지수는 점차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임종한 인하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좋은 직장을 갖게 되고 소득이 생겨도 출퇴근 거리가 멀면 막상 삶의 질은 떨어질 수 있다”며 “누구보다 바쁘고 또 열심히 사는데 행복하지 않다. 개인도 행복할 수 있는,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주거와 직업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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