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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 10분 길어지면 소득 19% 준다"…빈곤 부르는 '낭비통근'[출퇴근지옥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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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사회 문제가 된 출퇴근지옥

중앙일보는 서울시의 통신기지국 빅데이터인 ‘서울 생활이동 데이터’를 자체 분석해 출근시간대(오전 7~9시) 유입인구가 많은 ‘출근 1번지’ 6개 동(서울 여의동·역삼동·종로동·가산동·명동·서초동)을 선정했습니다. 이후 출근 1번지로 출근하는 인구가 일정 수 이상인 서울·경기·인천의 행정동을 추린 뒤 이 중 통근시간이 가장 긴 곳에 사는 ‘장거리 지역 통근자’와 통근 인구가 가장 많은 곳에 사는 ‘최다 이동 지역 통근자’ 12명을 동행·심층 인터뷰했습니다. 이를 통해 통근거리가 규정하는 이들의 삶을 ①삶의질 ②가족관계 ③건강 ④업무성과 ⑤경제적 상황 등 5가지 측면에서 따져봤습니다.

출퇴근지옥⑥ : 출퇴근 거리의 경제학

“아침마다 너무 힘들어요. 이사 가려고 서울 지도를 수십번 봤는데 지금 집 판 돈으로는 회사 가까운 곳에 마땅한 집을 구할 수가 없어요. 아기 키우려면 방도 2개는 있어야 할 텐데…. 빨리 돈부터 모으는 게 최선인 건 알죠. 근데 이사를 안 가면 차 할부에 기름값에 매달 수십만원씩 드는데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경기도 용인에 사는 서모(36)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인테리어 매장을 운영하는 서씨는 매일 아침 차로 22㎞를 달려 출근한다. 사무실도 같은 용인시이긴 하지만 거의 끝에서 끝이라 최소 1시간은 잡아야 한다. 막 잠에서 깼지만, 가다 서기를 반복하다 보면 금세 저녁이 된 듯 온몸이 피로해진다. 하지만 “아내를 생각하면 미안할 정도로 편한 출퇴근길”이라고 말했다.

아내 이모(36)씨의 직장은 집에서 약 60㎞ 떨어진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이다. 서씨가 차로 죽전역까지 이씨를 태워주고, 이씨는 여기서 광역버스를 탄 뒤 1시간 가량을 더 이동한다. 배차 간격이 짧지도 않은데, 승객이 가득 차 있는 경우도 다반사라 1~2대 정도는 그냥 보낸 뒤 타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1년여가 흐른 올해 초, 결국 이씨도 면허를 따고 차를 한 대 더 사기로 했다. 이씨는 “왕복 120㎞ 운전을 하면 당연히 녹초가 되지만, 지각해 욕을 먹는 것보단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모(36)씨의 직장은 용인 집에서 약 60㎞ 떨어진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이다. 회사의 양해 덕분에 가장 붐비는 출근 시간대를 피해 조금 늦게 집을 나서지만, 보통 1시간 30분 정도는 운전을 해야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 지난 18일 출근 후 촬영한 이씨 차량 계기판의 모습. 사진 이씨

이모(36)씨의 직장은 용인 집에서 약 60㎞ 떨어진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이다. 회사의 양해 덕분에 가장 붐비는 출근 시간대를 피해 조금 늦게 집을 나서지만, 보통 1시간 30분 정도는 운전을 해야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 지난 18일 출근 후 촬영한 이씨 차량 계기판의 모습. 사진 이씨

서씨는 결혼 전 사무실에서 10분 거리인 성남시 분당구의 소형 아파트에 살다 지금 집으로 이사했다. 주변에선 “분당 집값은 오를 테니 버티라”고 했지만, 이사를 피할 수 없는 사정들이 있었다. 우선 혼자는 살 만했지만, 결혼해 살기엔 집이 너무 좁고 낡았다. 그에 비해 집값은 비싸서 대출 이자도 부담이었다. 결정적으로 ‘코로나19 시대’가 시작됐다. 회사를 그만두고 스스로 매장을 차린 지 채 2년도 되기 전이었다. 인테리어 시장은 활황이었지만, 그것도 동네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곳들 얘기였다. 신규 방문 손님은 적고, 대출 등 자금통로는 급격히 좁아졌다. 버티려면 돈이 필요했다. 서씨는 결국 아파트를 팔고 용인시 주택으로 이사했다. 집값이 더 싸서 여윳돈을 마련할 수 있었고, 훨씬 넓고 깨끗한 데다 작은 마당까지 있었다. 그만큼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이 멀어졌지만, 출퇴근의 피로 정도는 버티고도 남을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하지만 출퇴근은 단순히 피곤한 일이 아니라, ‘돈과 시간의 빈곤’을 불러오는 악순환의 출발점이었다. 우선 비용이 만만찮았다. 부부가 각각 차로 출퇴근을 할 수밖에 없다 보니 할부금과 보험료, 세금이 2배로 든다. 여기까지만 60여만원. 게다가 두 사람이 매일 이동하는 거리는 왕복 160㎞로, 연료비까지 더하면 출퇴근 비용만 한 달에 100만원이 훌쩍 넘는다. 서씨는 “이사 온 지 2년, 결혼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사실상 모인 돈이 전혀 없다.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이사해야 하는데, 이사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매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는데 어디서부터 꼬인건지… 요즘 참 허탈하다”고 말했다.

숫자로 잡히지 않는 손해도 막심하다. “자영업은 결국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매출이 조금이라도 더 생긴다. 또 둘 다 기술이 있으니 시간 여유만 있으면 부업 같은 걸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출퇴근에 매일 2시간, 길게는 4시간까지 쓰는 지금은 꿈도 못 꾼다”고 부부는 말했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이처럼 출퇴근길에 버려지는 돈과 시간은 실제 소득이 감소하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불러온다. 영국 브리스톨대 연구팀이 근로자 2만6000명의 생활을 조사해 2017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출퇴근 시간이 10분 길어질 때마다 근로자들은 총소득이 19% 감소하는 것과 같은 정도의 직장 만족도 하락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준형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그 자체로 효용이 있는 시간도 아닌데 매일 소비되긴 한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낭비통근’으로 규정하기도 한다”며 “어떻게든 줄이는 게 좋겠지만, 현재는 재개발보단 도심 외곽개발 중심의 신도시 개발이 주를 이루고 있어 통근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우리 사회가 개인의 노력으로 출퇴근 문제를 극복하기는 어려운 구조라고 진단했다. 조금 더 많은 임금을 위해 장거리 출퇴근을 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역설적으로 거리가 멀어지면 그만큼 시간과 돈이 낭비된다. 이윤석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는 “주요 직장들이 특정한 지역에 몰려 있고 그 지역은 대부분 굉장히 지가가 높다. 새로 사회에 진출하거나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해당 지역에 사는 건 꿈 같은 일이다”라며 “결국 직장과 멀리 떨어져 살게 되고, 그러면 출퇴근에 굉장히 많은 시간과 돈을 쓰게 된다. 다 연결돼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장거리 출퇴근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결국 ‘높은 삶의 질’을 구성하는 요소 중 일부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 6월 22일 오전 8시 20분쯤 박씨가 자택에서 직장인 국회까지 도보로 출근하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박씨가 매일 아침 지나는 당산동 샛강 보행육교. 최서인 기자

지난 6월 22일 오전 8시 20분쯤 박씨가 자택에서 직장인 국회까지 도보로 출근하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박씨가 매일 아침 지나는 당산동 샛강 보행육교. 최서인 기자

중앙일보가 인터뷰한 직장인들 역시 출퇴근 시간을 줄이려 집을 옮긴 경우엔 대신 실질적인 소득이나 주거 환경 등을 포기했고, 반대로 주거 환경을 유지하며 지출을 줄이기 위해선 직장과 멀어져야만 했다. 여의도로 출근하는 박노권(34)씨는 통근시간이 지하철로 1시간 이상인 송파구에서 도보 15분 거리인 여의도 인근 오피스텔로 이사하며 월세는 15만원 더 지출하게 됐지만 집 크기는 오히려 줄었다. 반면 같은 여의도로 출근하는 김상일(51)씨는 아이들이 생기며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에서 더 넓고 깨끗한 김포 한강신도시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주거 환경은 훨씬 나아졌지만, 출근 시간은 30분에서 1시간 20분으로 늘었다.

김상일씨가 사는 김포시 장기본동 아파트는 단지 안에 초등학교 있는 이른바 ‘초품아’다. 김씨는 "자녀가 초등학교까지 도로 등의 위험 요소 없이 갈 수 있는 것도 주거지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김홍범 기자

김상일씨가 사는 김포시 장기본동 아파트는 단지 안에 초등학교 있는 이른바 ‘초품아’다. 김씨는 "자녀가 초등학교까지 도로 등의 위험 요소 없이 갈 수 있는 것도 주거지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김홍범 기자

한정된 자원으로 삶을 지탱하기 위해 무언가 하나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은 직주근접의 기회를 가장 먼저 내려놓는다. 포기하면 일시적으로 가장 많은 자원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어진 출퇴근이 불러오는 또 다른 비용과 부담은 예상보다 커 결국 악순환에 빠지는 경우가 적잖다. 전명진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은 주택 가격의 차별성이 크기 때문에 경제적 기반이 약한 사람들이 외곽이나 교외로 밀려나는 현상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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