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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씻어" 고성…아들 위해 이사했는데 아들과 멀어졌다[출퇴근지옥③]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회 문제가 된 출퇴근지옥

중앙일보는 서울시의 통신기지국 빅데이터인 ‘서울 생활이동 데이터’를 자체 분석해 출근시간대(오전 7~9시) 유입인구가 많은 ‘출근 1번지’ 6개 동(서울 여의동·역삼동·종로동·가산동·명동·서초동)을 선정했습니다. 이후 출근 1번지로 출근하는 인구가 일정 수 이상인 서울·경기·인천의 행정동을 추린 뒤 이 중 통근시간이 가장 긴 곳에 사는 ‘장거리 지역 통근자’와 통근 인구가 가장 많은 곳에 사는 ‘최다 이동 지역 통근자’ 12명을 동행·심층 인터뷰했습니다. 이를 통해 통근거리가 규정하는 이들의 삶을 ①삶의질 ②가족관계 ③건강 ④업무성과 ⑤경제적 상황 등 5가지 측면에서 따져봤습니다.

 김미숙(44)씨는 강동구 상일동에서 명동까지의 출근이 버거워 회사의 동의를 구하고 출근 시간을 10시로 미뤘다. 지난 6월 26일 김씨가 지하철로 출근하는 모습. 김민정 기자

김미숙(44)씨는 강동구 상일동에서 명동까지의 출근이 버거워 회사의 동의를 구하고 출근 시간을 10시로 미뤘다. 지난 6월 26일 김씨가 지하철로 출근하는 모습. 김민정 기자

출퇴근지옥③ : 출퇴근 거리와 가족관계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 살던 보험설계사 김미숙(44)씨는 2020년 3월 강동구 상일동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상일동은 서울 동쪽 끝자락에 있다. 사무실이 있는 명동까지 출근하려면 1시간30분 가량 걸리지만, 큰아들 중학교 진학에 맞춰 더 나은 교육환경을 찾아 이사를 결정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직주근접(職住近接)’을 포기한 것이다. 김씨는 “내 출근은 잠시지만, 아이들은 풀냄새 나는 공기를 마신다”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상일동 이사 후 3년이 지난 6월 26일 만난 김씨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먼 곳으로 이사했는데, 오히려 가족의 행복과 더 멀어진 것 같다”고 한탄했다. “전쟁 같은 장거리 통근에 몸을 맞추다 보면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도 부족해지지만, 몸이 고된 탓에 스트레스가 쌓여 가족관계가 나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이날 오전 7시에 기상한 김씨는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다 말았다. 아이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해서다. “빨리 씻어라. 꼼지락거리면 안 된다”는 고성이 집안에 쩌렁쩌렁 울리자, 아이들도 짜증을 부렸다. 아이들이 밥을 먹는 사이 화장을 절반 정도 마친 김씨는 오전 8시10분쯤 초등학생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아이들 등교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설 수 있는 것도 “출근을 오전 10시로 늦춰주지 않으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며 회사에 읍소한 끝에 얻어낸 성과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8시20분쯤, 5호선 상일동역에 도착한 김씨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플랫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하철에 탑승한 김씨는 분기역(강동역)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여기서 못 앉으면 절대 못 앉아 간다”며 황급히 자리를 잡았다. 이어 나머지 화장을 마무리한 뒤, 업무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환승역(을지로4가)에서 내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다음 역(종로3가)에 닿을 때야 깨닫고 열차를 갈아탄 김씨는 간신히 10시 출근에 성공했다.

김미숙씨가 자녀를 위해 만든 음식들.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 거주할 당시엔 자녀의 식사를 매끼 준비하고, 주변 이웃에게도 많이 나눠 '김장금'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통근에 지쳐 배달 음식을 자주 이용한다. 사진 김미숙씨

김미숙씨가 자녀를 위해 만든 음식들.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 거주할 당시엔 자녀의 식사를 매끼 준비하고, 주변 이웃에게도 많이 나눠 '김장금'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통근에 지쳐 배달 음식을 자주 이용한다. 사진 김미숙씨

김씨는 퇴근길도 분주하다. 오후 6시. 김씨는 퇴근 지하철에 오르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 ‘배달앱’부터 켰다. 김씨는 “전농동에 살 땐 주중에도 매일 저녁을 챙겨줬다. 당시 별명이 ‘김장금’이었다”며 “이제 어쩔 수 없이 주 3회 정도는 배달 음식을 시킨다”고 말했다. “건강식 반찬을 골라야 한다”며 한참 스마트폰을 뒤적이던 김씨는 이날 찜닭 메뉴를 주문했다. “퇴근 이후, 못 챙겼다는 마음에 ‘숙제하라’고 아이들에게 큰 소리 낼 때가 많다. 못 챙겨주는 게 미안해 그런 건데 아이들은 그걸 또 몰라주니….”

남편과 결혼 후 가장 크게 싸운 것도 상일동으로 이사한 직후였다. 한 달간 남편과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 김씨는 “남편이 가사분담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게 서운해 싸웠다”며 “돌이켜보면 멀어진 출퇴근 거리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는데, 몸이 너무 힘들다 보니 서운한 감정이 풀리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아이들만 데리고 제주도로 훌쩍 떠나 2박3일 여행한 뒤에야 부부 관계가 진정됐다고 했다. 김씨는 “내년쯤엔 원래 살던 전농동으로 다시 이사해야 되나 싶다”고 말했다.

박원(38)씨의 출근길은 도착역인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가져가도 22분 12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 김홍범 기자

박원(38)씨의 출근길은 도착역인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가져가도 22분 12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 김홍범 기자

김씨처럼 명동으로 출근하지만, 마포구 공덕동에 사는 박원(38)씨는 상황이 정반대다. 6월 28일 동행한 박씨의 출근길은 22분 12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걸어도 45분이면 충분한 거리라 그날의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 통근 방법을 선택한다.

가족과의 시간은 줄어든 통근시간만큼 더 확보됐다. 지난 4월에는 2살 늦둥이 아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열이 많이 나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는 전화가 걸려온 적이 있었다. 업무가 한창인 시간이었지만, 박씨는 동료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차로 10분 거리의 어린이집에 들러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진료를 마치고 직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했다. 박씨는 “직장이 멀었으면 정말 난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전 7시30분쯤 초등학생 두 딸을 통학 버스에 태울 수 있는 것도 가까운 직장 덕이다. 이날 박씨는 아이들과 작별 인사하고 4분 뒤 2호선 아현역에서 지하철에 탑승해 오전 7시57분쯤 회사에 도착했다.

박씨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운동 삼아 약 45~50분을 걸어 회사로 출근한다. 출근이 급할 날에는 택시를 타면 약 10분 정도면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 김홍범 기자

박씨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운동 삼아 약 45~50분을 걸어 회사로 출근한다. 출근이 급할 날에는 택시를 타면 약 10분 정도면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 김홍범 기자

오후 5시쯤 근무를 마치는 박씨는 약속이 없는 날엔 오후 6시면 귀가한다. 두 딸이 집 근처 태권도 학원에 가기 전에 저녁을 챙기는 건 박씨의 몫이다. 저녁을 챙겨 먹이는 한 시간 동안 딸들이 최근 배우고 있는 자세부터 다음 날 학교 일정까지 도란도란 이야기가 오고 간다. 요리를 좋아하는 박씨는 장 보는 것부터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것까지 주방일을 맡고, 아내는 청소와 빨래를 담당한다. 각자의 역할이 분명해 부부싸움을 할 일도 적다는 게 박씨의 생각이다. 박씨는 “회사에서 먼 신도시에서 살면 더 쾌적한 환경을 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순 있다”면서도 “직장인이 시간을 확보할 방법은 통근시간 절감뿐인데, 쾌적함 대신 가족과의 시간을 택한 셈”이라고 말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실제로 긴 통근 시간은 가족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김준형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가 2014년 한국노동패널조사에 참여한 만 15세~만 74세 인구 약 1만명을 분석한 결과 통근 시간이 60분 미만인 집단에선 가족 활동에 90분 이상 투입한다는 응답자가 39%였지만, 통근 시간이 150분 이상일 경우엔 21%로 급감했다. 또 통근 시간이 60분 미만일 경우 매일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는 응답자가 절반 이상(52%)인 것과 달리 150분 이상일 경우 33%로 낮아졌다.

장재민 한국도시정책연구소 소장은 “긴 통근길은 가족이 함께 보내게 되는 시간을 줄여 일과 가정이 양립되기 어렵게 만드는 주요한 요소”라며 “아이들의 성장 시기에 따른 부모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하지만, 그간 사회적 관심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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