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누칼협이래요"…'출퇴근 고통' 일상화, 개인이 풀기 힘든 이유 [현장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습관이 돼서 괜찮아요. 새벽 출근길이라고 딱히 피곤하지도 않아.”
지난달 13일 새벽 4시 서울 정릉동에서 첫차에 탄 이모(66)씨는 이른 출근길이 피곤하진 않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교통체증이 없는 새벽 출근길에도 1시간을 꼬박가야하는 고된 길이지만, 이씨는 “이제 23년째니까, 3시면 눈도 자동으로 떠진다”고 했다. 오전 5시 15분에 일어나 6시 20분에 출근길에 나서는 심은주(42)씨도 장거리 출퇴근에 대해 “처음에야 좀 어려웠지, 지금은 괜찮아졌다”고 말했다. 심씨는 서울 진관동에서 서초3동까지, 매일 아침 1시간 20분에 걸쳐 21㎞를 이동한다.

중앙일보는 유입인구가 많은 ‘수도권 출퇴근 1번지’(서울 여의동·역삼동·종로동·가산동·명동·서초동)로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들을 심층 인터뷰하고, 출근길에 동행했다. 이들이 매일 ‘지옥철’이나 만원버스, 꽉막힌 도로위 등에서 보내는 시간은 평균 2시간 42분이었다. 한국 노동자의 월 평균 근로 일수와 실질 은퇴 연령 등을 감안하면 인생의 3년 넘는 시간을 출퇴근에 쓴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때문에 학계에선 “낭비통근”이라는 용어까지 통용되고 있다.

지난달 24일 출근길 김포골드라인 객차안의 모습. 사람들은 초만원이 된 전철 안에서 서로를 의지해 겨우 서서 버티거나, 성추행범으로 오해를 받을까 봐 휴대전화를 높이 들기도 했다. 한강신도시(구래동)에 사는 강희경(43)씨는 매일 서울 여의도의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 김포골드라인과 지하철 9호선을 차례로 이용한다. 심석용 기자

지난달 24일 출근길 김포골드라인 객차안의 모습. 사람들은 초만원이 된 전철 안에서 서로를 의지해 겨우 서서 버티거나, 성추행범으로 오해를 받을까 봐 휴대전화를 높이 들기도 했다. 한강신도시(구래동)에 사는 강희경(43)씨는 매일 서울 여의도의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 김포골드라인과 지하철 9호선을 차례로 이용한다. 심석용 기자

중앙일보가 만난 장거리 통근자들은 “괜찮다. 다른 직장인들도 다 그렇게 산다” “힘은 들지만 적응이 됐다” 등의 반응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남 모를 고통을 겪고 있었다. 자녀 교육을 위해 이사한 뒤 출근 시간이 2배로 길어진 지혜영(45)씨는 디스크와 만성 피로 등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김미숙(44)씨도 출퇴근 거리가 1시간 30분 거리로 멀어진 직후 남편·자녀와의 다툼이 잦아졌고, 1시간 40분을 버스로 출근하는 신모(39)씨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업무 효율이 낮아졌다고 했다. 단거리 통근자와의 삶의 질 차이도 컸다.

전문가들은 장거리 통근자들이 출퇴근 고통에 둔감해진 이유로 ‘고통의 일상화’를 꼽았다. 임종한 인하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매일 통근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개인이 곧바로 인지하긴 쉽지 않다. 마치 뜨거운 물 속 개구리가 온도 변화를 못 느낀채 죽어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고통을 토로했다가 외려 비난받는 상황은 장거리 통근자들을 더 움츠리게 만든다. 용인에서 서울 한남동으로 통근하는 이모(36)씨는 “가까운 지인조차 출퇴근이 힘들다고 하면 ‘직장도 집도 네가 선택한건데 왜 불평하냐’는 식”이라며 “인터넷에선 ‘누칼협(누가 서울로 취업하라고 칼들고 협박했냐)’이라거나 ‘신축 살려고 경기도 갔으면 감수하라’는 반응이 흔하다“고 씁쓸해했다. 이런 반응에 호응하듯 “자식 키우기 좋은 환경을 찾아가려면 ‘직주근접(職住近接)’은 포기할 수 밖에 없다”며 자조하는 이들도 다수였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그러나 장거리 통근에 따른 고통을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것으로만 치부할 경우 문제 해결은 더 멀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윤석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는 “직장에서 멀리 밀려나는 것들은 이미 자리를 견고하게 잡고 있는 악재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현상”이라며 “개인 탓으로만 돌려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김준형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한국 도시·주택 정책은 원칙에 대한 고민 없이 외곽 위주로, 주택만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며 “이런 방식이 직주근접과 거주환경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출퇴근 가능 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이뤄진 과거 개발방식의 전면 재검토, 그리고 재택·유연근무 등 노동 혁신이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직주근접과 거주환경이 양자택일해야 하는 제로섬 관계가 아니게 될 때 ‘고통의 일상화·개인화’도 극복할 수 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