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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디스크가 덮쳤다…출근길 1시간 길어지자 벌어진 일[출퇴근지옥④]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회 문제가 된 출퇴근지옥

중앙일보는 서울시의 통신기지국 빅데이터인 ‘서울 생활이동 데이터’를 자체 분석해 출근시간대(오전 7~9시) 유입인구가 많은 ‘출근 1번지’ 6개 동(서울 여의동·역삼동·종로동·가산동·명동·서초동)을 선정했습니다. 이후 출근 1번지로 출근하는 인구가 일정 수 이상인 서울·경기·인천의 행정동을 추린 뒤 이 중 통근시간이 가장 긴 곳에 사는 ‘장거리 지역 통근자’와 통근 인구가 가장 많은 곳에 사는 ‘최다 이동 지역 통근자’ 12명을 동행·심층 인터뷰했습니다. 이를 통해 통근거리가 규정하는 이들의 삶을 ①삶의질 ②가족관계 ③건강 ④업무성과 ⑤경제적 상황 등 5가지 측면에서 따져봤습니다.

지난 6월 26일 오전 지혜영씨가 남양주 별내신도시에서 종로로 출근하고 있다. 지씨는 오전 6시 10분에 일어나 30분쯤 출근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면 1시간 30~40분 뒤에 회사에 도착한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아침 일찍 나와 버스를 타고 종로로 가는 출근길을 찾았다고 한다. 최서인 기자

지난 6월 26일 오전 지혜영씨가 남양주 별내신도시에서 종로로 출근하고 있다. 지씨는 오전 6시 10분에 일어나 30분쯤 출근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면 1시간 30~40분 뒤에 회사에 도착한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아침 일찍 나와 버스를 타고 종로로 가는 출근길을 찾았다고 한다. 최서인 기자

출퇴근지옥④ : 장거리 출퇴근과 건강

허리 디스크, 급성 A형 간염, 만성 피로와 스트레스, 잦은 기침·감기, 예민해진 성격, 아이의 식사량과 체중 감소.

출퇴근 시간이 2배 넘게 길어진 뒤 2~3년 동안 지혜영(45)씨가 겪은 고통이다. 경기도 남양주 별내동에서 중학교 3학년 아이를 키우는 지씨는 매일 서울시 종로구 종로1·2·3·4가동(장사동)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한다. 오전 6시 10분에 일어나 30분쯤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면 1시간 30~40분 뒤 회사에 도착한다.

지씨가 ‘장거리 통근자’가 된 건 10년 전, 지금 사는 집에 이사 오고부터다. 직전엔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서 전세로 신혼집을 마련해 살았다. 그는 “나고 자란 서울을 떠나긴 했지만, 내 집을 갖게 된 게 참 좋았다. 초·중·고가 다 가까워서 아이에게도 너무 좋은 환경이었다. 지금도 살기 너무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나빠진 점은 단 한 가지, 멀어진 출퇴근 거리였다. 월계동에서 회사까진 30~40분이 걸렸지만, 이사 뒤엔 정확히 1시간이 늘어났다. 처음 2~3년이 특히 고비였다. ‘지옥철’을 갈아타며 1시간 넘게 이동하는 것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최적의 시간과 동선을 찾다 지각하는 등 수 없는 시행착오를 겪었다. 처음엔 이동시간이 가장 짧은 지하철을 택했다. 집 앞에서 버스로 6호선 화랑대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탄 뒤 동묘앞역에서 다시 1호선으로 환승하는 여정이었다. 회사 근처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 노선이 하나 있었지만, 20분 더 일찍 나서야 했고 승객이 많을 땐 버스 여러 대를 그냥 보내야 했다.

지난 6월 26일 비가 오던 날. 지혜영씨가 종로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있다. 지씨는 지하철 대신 버스를 이용한다. 출근 시간은 더 길어졌지만 언제 나와야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 딱 맞춰 회사에 도착할 수 있는지 ‘타이밍’을 익히게 되면서 상황이 좀 나아졌다고 한다. 최서인 기자

지난 6월 26일 비가 오던 날. 지혜영씨가 종로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있다. 지씨는 지하철 대신 버스를 이용한다. 출근 시간은 더 길어졌지만 언제 나와야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 딱 맞춰 회사에 도착할 수 있는지 ‘타이밍’을 익히게 되면서 상황이 좀 나아졌다고 한다. 최서인 기자

“디스크에 간염 입원까지…아이 건강도 함께 나빠져”

그러나 20분과 맞바꾸기엔, 지하철에서 겪는 고통이 너무 컸다. 그는 “너무 힘든 날들이었다. 팔을 뻗어 손잡이를 겨우 붙잡고, 몸은 항상 끼어있는 상태에서 열차가 서거나 출발할 때마다 앞뒤로 밀리고. 안 아픈 데가 없었다. 모든 게 다 짜증났다. 어느 순간 회사는 물론 집에서도 계속 짜증을 내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출근을 안 할 순 없었다. 고통이 반복되자 지씨의 건강에 여러 위험 신호가 나타났다. 극심한 피로나 스트레스는 기본이었다. 지씨는 “병원에 가보니 허리 디스크가 왔다. 또 한 번은 급성 A형 간염에 걸려서 거의 한 달 동안 입원했다. 출근길이 무섭고, 지쳤다”고 했다.

이후 지씨는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택했다. 출근 시간이 더 길어졌지만 언제 나와야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 딱 맞춰 회사에 도착할 수 있는지 ‘타이밍’을 익히게 되면서 상황이 좀 나아졌다. 하지만 더 큰 시련이 닥쳐왔다.

지씨의 몸과 마음만 상한 게 아니었다. 출근은 빨라지고 퇴근은 늦어지며 당시 7살이었던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었다. 아침엔 가족들이 깰까 조용히 방문만 살짝 열어 잠든 아이 얼굴을 보고 황급히 집을 나섰다. 지씨는 “퇴근 후 유치원에 달려가면 다른 아이들은 다 집에 가고 우리 아이만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 아이가 불안했던 것 같다”며 “밥도 잘 안 먹고 체중도 줄고, 결국 2달쯤 뒤부터 아이가 자꾸 아팠다. 자주 기침을 하거나 감기에 걸리고, 성격도 예민해져 화를 자주 냈다”고 회상했다. 지씨는 “출퇴근 때문에 이직도 고민하고 그만둘 생각마저 했다.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고 말했다.

장거리 통근을 오래 한 통근자들은 대부분 지씨와 같이 몸에 이상 신호를 느꼈다고 했다. 경기 고양시에서 서울 강남구 역삼동까지 왕복 3시간을 출퇴근하며 겪은 고통을 한 컷짜리 그림에 담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에 올리고 있는 직장인 A씨(31)는 “툭하면 등과 허리에 통증을 느끼고, 식사 후 장거리 이동 때문에 항상 속이 더부룩하며 식도염도 고질병이 됐다. 수면 시간은 당연히 줄였고 저녁은 선식류로 대신한다. 운동도 취미도 포기했다”고 했다. 이씨의 SNS 계정엔 개설 약 1년 만에 약 3만명의 팔로워가 생겼다. 대다수가 출퇴근 고통에 공감하는 직장인들이다.

‘장거리 통근자’인 직장인 A씨는 지난해부터 자신이 출퇴근을 하며 경험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 SNS에 올렸다. 출퇴근 고통에 공감하는 직장인들이 해당 계정을 팔로우하며, 약 1년 만에 수가 약 3만명으로 늘었다. A씨는 “방 한칸 전셋집도 직장 근처에 구하려면 1~2억원이 필요하다. 별수 없이 5년 넘게 출퇴근을 했지만, 갈수록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저처럼 장거리 출퇴근에 힘들어 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보니 많이 공감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림 A씨

‘장거리 통근자’인 직장인 A씨는 지난해부터 자신이 출퇴근을 하며 경험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 SNS에 올렸다. 출퇴근 고통에 공감하는 직장인들이 해당 계정을 팔로우하며, 약 1년 만에 수가 약 3만명으로 늘었다. A씨는 “방 한칸 전셋집도 직장 근처에 구하려면 1~2억원이 필요하다. 별수 없이 5년 넘게 출퇴근을 했지만, 갈수록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저처럼 장거리 출퇴근에 힘들어 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보니 많이 공감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림 A씨

장거리 출퇴근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 ‘출퇴근 소요 시간과 주관적 정신건강과의 관련성(이효춘 외 4명, 2022)’ 연구에 따르면 왕복 통근 시간이 30분 이하인 취업자에 비해 60분~120분인 취업자가 1.33배 더 우울감을 느꼈고 불안감은 1.35배, 전신 피로 역시 1.39배 더 느꼈다. 또 120분 이상일 경우 1.47배 우울했고 2.03배 더 불안했으며, 2.12배 더 피로했다. 정인철 아주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팀이 지난 4월 발표한 연구에서도 통근시간 20분을 기준으로 봤을 때, 60~79분인 경우 우울증 위험 단계로 분류될 확률이 1.11배, 80분이 넘으면 1.17배 더 커졌다.

임종한 인하대병원 작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출퇴근 시간이 길면 도로에서 여러 유해 물질에 노출되는 시간도 길어지고, 세포의 화학적 구조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며 “스트레스로 몸의 조절 기능을 떨어뜨려 신체 방어 기능을 손상하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여러 질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운동 못 하니 100㎏ 넘겨”…장거리 출퇴근에 망가진 몸

지난 6월 23일 이창원씨가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서 가산동으로 출근하고 있다. 이씨의 자택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엔 따릉이 대여소가 있다. 그는 고장 난 자전거에 탑승해 중간에 멈춰선 기억 때문에 점검을 철저하게 한다고 했다. 심석용 기자

지난 6월 23일 이창원씨가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서 가산동으로 출근하고 있다. 이씨의 자택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엔 따릉이 대여소가 있다. 그는 고장 난 자전거에 탑승해 중간에 멈춰선 기억 때문에 점검을 철저하게 한다고 했다. 심석용 기자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사는 이창원(44)씨는 통근 거리에 따른 건강 변화를 체험한 경우다. 지금은 집에서 약 1.6㎞ 떨어진 가산동의 게임 회사에 다닌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끼어가는 대신 ‘따릉이(서울시 공유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자출족’이다. 출근길에 동행한 지난 6월 23일 오전 7시쯤, 간편한 티셔츠와 바지, 운동화와 모자 차림으로 집을 나선 그는 곧장 집 앞 따릉이 대여소로 향했다. 총 출근 시간은 20여 분, 자전거 페달을 밟는 시간은 10분이 채 안 된다. 나머지는 고장 나지 않은 따릉이를 골라내 빌리고 반납하거나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는 시간이다. 그는 틈날 때마다 주변 가로수나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거리를 달려 회사에 도착했다.

지난 6월 23일 이창원씨가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서 가산동으로 출근하고 있다. 그가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횡단보도 7개를 건너는 동안 차도 건너편에서 직장인들이 대부분 손에 커피를 든 채 가산디지털단지를 향해 빠르게 걷고 있었다. 10분을 달린 뒤 직장 앞에서 자전거 킥스탠드(받침다리)를 내린 이씨는 “예전보다 이동 거리가 줄어드니 퇴근한 뒤 운동하고 제때 식사까지 할 수 있게 됐고 건강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심석용 기자

지난 6월 23일 이창원씨가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서 가산동으로 출근하고 있다. 그가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횡단보도 7개를 건너는 동안 차도 건너편에서 직장인들이 대부분 손에 커피를 든 채 가산디지털단지를 향해 빠르게 걷고 있었다. 10분을 달린 뒤 직장 앞에서 자전거 킥스탠드(받침다리)를 내린 이씨는 “예전보다 이동 거리가 줄어드니 퇴근한 뒤 운동하고 제때 식사까지 할 수 있게 됐고 건강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심석용 기자

이씨의 출근길이 이처럼 여유로워진 건 지난해 4월부터다. 그전까진 매일 통근 전쟁을 치렀다. 대학교 땐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에서 경기도 안산까지 1시간 10분 거리를 통학했고, 졸업 후 10년 넘게 만원 지하철과 버스로 1시간 이상 이동했다. 긴 출근길 때문에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취미생활도 못 했지만, 더 큰 고민은 건강이었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이날 약 20분의 출근길 동안 ‘건강’이라는 단어를 8번이나 사용한 그는 “회사까지 거리가 멀던 땐 지금보다 체중이 10㎏ 이상 더 나갔다. 2년 전쯤엔 100㎏을 넘긴 적도 있었다”며 멋쩍어했다. 심각성을 인지한 그는 이후 이직 기회가 왔을 때도, 이사를 할 때도 ‘직주근접’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이씨는 “지금이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다”며 “헬스장에서 PT까지 받은 뒤 집에 와도 7시 반을 넘기지 않는다. 시간이 많아지니 스트레스도 줄고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정신없이 집을 나서던 때와 달리 지금은 출근 전 비타민 등 영양제 다섯 종류를 챙겨 먹고, 식사를 거르는 일도 거의 없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크리스틴 호에너 미국 워싱턴대 의학과 교수팀은 2012년 출퇴근 시간이 길어질수록 신체활동과 심장혈관 적합도가 떨어지고 15㎞ 이상 출퇴근자는 고혈압 가능성이, 24㎞ 이상이면 지방 과다 및 비만 확률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또 ‘통근시간이 노동활동과 건강상태에 미치는 영향’(김준형, 2016)에 따르면 통근시간이 길어질수록 수면 시간이 확연히 감소한다. 통근시간이 60분 미만인 경우 7시간 이상 자는 사람이 72%였지만, 통근시간이 150분 이상인 경우엔 47%로 뚝 떨어졌다.

미국 브라운대 토마스 제임스 크리스천 연구팀도 출근 시간이 1분 늘면 운동시간(0.0257분), 식사 준비 시간(0.0387분), 수면시간(0.2205분)이 모두 줄어들어 건강이 나빠진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류재홍 경희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출퇴근은 매일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면 삶의 질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며 “출퇴근 시간과 정신건강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등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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