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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돌보고 월급 받는다…'전업 자녀' 길 택하는 中 아들·딸 [세계한잔]

중앙일보

입력

세계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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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에 사는 리 씨(40)는 최근 '전업 아들'을 선언했다. 월급 2만 위안(약 358만원)을 받던 직장인이던 그는 어머니 장 씨(68)가 큰 병을 얻자 병간호차 장기 휴가를 냈다. 다행히 어머니는 완치했지만, 리 씨는 이를 계기로 직장을 그만두고 부모님 돌보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나섰다.

리 씨는 매일 세 끼 밥상을 차려 부모에게 드리고 집 청소·빨래 등 가사를 전담한다. 저녁마다 부모를 모시고 개를 동반해 산책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남는 시간에는 주식 투자·운동·독서 등을 한다. 리 씨의 부모는 정년퇴직 후 매월 1만1000위안(약 196만원)의 퇴직연금을 받고 있는데 이 중 리 씨에게 '수당' 명목으로 월 5500위안(약 98만원)을 준다. 이는 지난해 중국 대졸자 평균 초임인 월 5990위안(약 106만원)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다.

중국에서 자녀가 직장을 다니지 않으면서 자기 부모를 위해 식사와 청소 등을 전담하는 대신, 부모가 자녀에게 '월급'을 주는 '전업 자녀'가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 셔터스톡

중국에서 자녀가 직장을 다니지 않으면서 자기 부모를 위해 식사와 청소 등을 전담하는 대신, 부모가 자녀에게 '월급'을 주는 '전업 자녀'가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 셔터스톡

#통신사에서 15년간 기자로 일한 녠안(41)은 '전업 딸'로 살고 있다. 24시간 긴장 상태로 일하며 지쳐 이직을 고려하던 그에게 부모가 먼저 '전업 딸'을 제안했다. "우릴 돌봐 주면 월 1만 위안(약 179만원) 들어오는 퇴직연금 가운데 40%인 4000위안(약 72만원)을 월급으로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부모의 제안을 받아들인 녠안은 퇴직 후 본가에서 살며 부모와 함께 장을 보거나 요리·산책을 한다. 특히 컴퓨터 등 전자기기 수리는 오롯이 딸의 업무다. 가끔 아버지가 밖에서 술을 드신 저녁이면 아버지의 '대리운전' 기사가 되기 위해 달려간다. 촘촘히 계획을 짜서 매달 1~2차례 가족 여행도 다녀오는 것도 업무다. 그는 "부모님이 잠드셔야 하루 일이 끝난다"고 전했다.

최근 몇 년새 중국에서 '전업 자녀(중국어로 全職兒女)'가 늘고 있다고 AFP통신과 인민망 등이 보도했다. 사진 소후닷컴 캡처

최근 몇 년새 중국에서 '전업 자녀(중국어로 全職兒女)'가 늘고 있다고 AFP통신과 인민망 등이 보도했다. 사진 소후닷컴 캡처

최근 몇 년새 중국에서 이런 '전업 자녀(중국어로 全職兒女)'가 늘고 있다고 AFP통신과 인민망 등이 보도했다. 직장이 없는 자녀가 자기 부모를 위해 식사와 청소 등을 전담하는 대신, 부모가 자녀에게 '월급'을 주는 새로운 트렌드다. 전업 주부와 비슷하지만, 전업 자녀는 월급을 받는다는 차이가 있다.

전업 자녀의 업무로 애완견 산보, 청소, 식사준비, 부모님과의 산책 등이 꼽힌다. 사진 시나닷컴 캡처

전업 자녀의 업무로 애완견 산보, 청소, 식사준비, 부모님과의 산책 등이 꼽힌다. 사진 시나닷컴 캡처

한국에서도 논란이 된 '캥거루족'과도 다르다. 캥거루족은 부모 집에 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 의지해 생활하는 반면, 전업 자녀는 부모를 돌보면서 가사업무·간호 등을 하고 부모에게 대가를 받는다.

중국 관영 인민망에 따르면 중국에서 전업 자녀가 늘어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들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올해 5월 기준 중국의 16~24세 청년실업률은 평균 실업률의 4배인 20.8%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올해 7~8월 사상 최다인 대졸자 1158만 명이 취업 시장에 쏟아지게 되면 중국 청년들의 일자리 상황은 더 악화할 전망이다. 이런 상황 속에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부모 돌봄'을 일종의 '일자리'로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기 자녀에게 '월급'을 줄 여유가 있는 부모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인민망은 "전업 자녀 개념이 가능해진 것은 일부 부모에게 그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면서 "여기에 부모가 자녀와 늘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겹치면서 '유연한 취업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층이 늘면서 자신의 부모를 돌보고 부모에게 월급을 받는 일명 '전업 자녀'가 늘고 있다. AP=연합뉴스

중국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층이 늘면서 자신의 부모를 돌보고 부모에게 월급을 받는 일명 '전업 자녀'가 늘고 있다. AP=연합뉴스

일각에선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게 과연 타당하냐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내 자식이 밖에서 일하면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내가 월급을 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부모들의 반론도 나온다.

SCMP에 따르면 녠안의 부모는 "딸이 만일 좋은 일자리를 찾게 되면 그때 직장에서 일하면 된다"면서 "하지만 딸이 직장을 구하기 싫다면 그냥 집에 있으면서 우리와 시간을 보내면 된다"고 말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전업 자녀는 취업 시장에서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고, 취업을 해서도 '996'(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일하는 가혹한 업무 환경) 상황에 놓이게 되는 청년층에게 '대안 일자리'로 떠올랐다. SCMP는 "부모와 자녀 모두 진심으로 행복하다면, 전업 자녀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중국에서 '전업 자녀'가 가능한 이유는 돌봄이 필요하면서 자기 자녀에게 '월급'을 줄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있는 노령층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신화=연합뉴스

중국에서 '전업 자녀'가 가능한 이유는 돌봄이 필요하면서 자기 자녀에게 '월급'을 줄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있는 노령층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신화=연합뉴스

실제로 '전업 자녀'의 길을 택한 당사자들은 만족하고 있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전업 아들' 리 씨는 부모 집에 살고 있어 생활비가 별로 들지 않는다고 했다. 리 씨는 AFP통신에 "직장인 시절에는 월급 2만 위안을 받아도 따로 집을 얻어 생활하다 보니 저축이 불가했다"면서 "지금은 오히려 생활비가 거의 안 들어 돈을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어머니 장 씨는 통신에 "아들이 결혼하지 않고 있어 조금 걱정은 되지만, 독신에게는 독신 나름의 행복이 있을 것이고 아들이 돌봐줘서 좋다"고 전했다.

인민망은 "요즘은 수입이 많은 것보다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 업무 환경을 선호하는 추세"라면서 "기성세대가 너른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반면 전업 자녀는 일시적인 도피처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공무원 시험 등에 합격해 전업 자녀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현지 언론들은 "언제든 부모의 퇴직연금이 고갈할 수 있기에 불안정한 자리"라면서 "사실상 백수라는 불안감을 덜기 위한 방편이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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