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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만 3년째" 분통 터뜨린다…김명수 6년, 법원은 동맥경화 [280번의 재판, 잊혀진 정의]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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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번의 재판, 잊혀진 정의①

사법부는 중증 동맥경화를 앓고 있다. 재판 지연에 분통을 터뜨리는 당사자들의 모습은 법원의 익숙한 풍경이다. 특히 1심 마비 증세는 심각한 수준이다. 2017년 사법농단 의혹이 제기된 이후 이어진 대법원장 구속과 판사 14명 기소라는 초유의 사태를 딛고 등장한 김명수 코트가 대법원장에 집중된 행정권력을 해체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인사상 '당근과 채찍'을 포기하자 법관사회에 들어선 수평적 문화는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박탈과 동전의 양면을 이뤘다. 그 사이 ‘무엇이 사법농단인가’를 가리기 위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1심 재판은 4년 넘는 기간 동안 280차례(12일 기준) 열렸다. 평가의 부재 속에 시행착오가 누적되면서 사법부는 표류 중이다. 3개월 뒤 대법원장이 바뀐다.

2018년 9월 13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열린 '대한민국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왼쪽 두 번째)이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화를 나누며 박수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8년 9월 13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열린 '대한민국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왼쪽 두 번째)이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화를 나누며 박수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해고 노동자 A씨는 2020년 가을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1심 선고기일이 오는 11월로 잡혔다. 마지막 변론기일은 지난달 25일에 열렸다. 범죄 피해자 B씨도 경찰 수사를 문제 삼아 2019년 국가 배상을 청구했지만 1심 선고가 날 때까지 2년, 항소 후 첫 재판이 열릴 때까지 또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서울 서초동의 한 중견 변호사는 “사건이 쌓여 있다는 이유로 선고 기일이 한없이 밀리는 일이 다반사”라며 “재판장이 기록을 제대로 안 봐 변론이 재개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심각한 동맥경화를 앓고 있다. 2017년 평균 9.8월 만에 처리되던 민사 합의부 1심 사건이 2021년에는 평균 12.3월 소요됐다. 2년 이상 걸리는 1심 사건은 2017년 2929건이었지만 2021년에는 4897건으로 치솟았다.(동일인에 의한 과다 소제기 제외, 2022 사법연감) 형사 재판도 마찬가지다. 2년 넘게 1심 결말을 보지 못한 피고인이 2022년에만 4781명이나 됐다. 2017년(1709명)에 비해 세 배 가까이로 늘어난 것이다. 소송촉진법에는 형사 사건은 ‘1심 기소 후 6개월 내’에 선고해야 한다’(제21조), 민사소송법에는 1심 선고는 ‘마지막 재판 이후 1개월 내에 해야 한다’는 규정(제207조)이 있지만 다른 세상 얘기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법원은 “사건은 늘고 판사는 부족하다”는 입장이지만 상황은 2017년 소위 ‘사법농단’ 사건의 발생 이후 급격히 악화됐다. 그해 9월 등장한 ‘김명수 코트(court)’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휩싸였던 양승태 코트의 사법부 운영 체계를 수술대에 올린 결과다. 한 지법 부장판사는 “문제만 도려냈어야 했는데 모든 걸 다 없애버렸다”며 “인사제도 전반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데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6년이 채 안되는 새 법원의 인사 체계와 업무 문화는 180도 달라졌다. 법원의 현 주소를 진단하기 위해 전·현직 법관 30명을 만났다.

채찍·당근 다 치운 자리에 채운 워라밸

 “사법행정이 재판의 지원이라는 본래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재판 중심의 사법행정을 실천하겠다”(2017년 9월 26일 취임사)고 약속한 김명수 대법원장은 임기 내내 법관 인사에 대한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권한을 덜어내고 위계서열적 조직 구조를 해체하는 일에 몰두했다. 차관급인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를 폐지하고, 행정처 근무 판사 수를 최소화하고,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도입해 일선 법관들이 법원장 후보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법원장의 권한이던 사무분담(판사들이 어떤 재판을 담당할지 정하는 절차)을 각급 법원에 설치한 사무분담위원회의 몫으로 돌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상고법원 도입을 통해 상고심 적체와 법관 인사 적체를 해소하려던 양승태 코트가 ‘강한 행정처’를 앞세워 주요 사건 재판 진행을 모니터하고 법원 내 비판 목소리를 잠재우려다 행정권 남용과 재판거래 의혹에 빠진 것에 대한 반편향이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2017년 9월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이 2017년 9월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갑자기 들어선 수평적 문화를 반기는 법관들도 있다. 한 지법 판사는 “법원장이나 수석부장은 마냥 무섭기만 한 존재였는데 눈치를 덜 보게 됐다”며 “젊은 판사들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 지법 부장판사는 “예전과는 180도 달라졌다”며 “‘행정처에서 전화 온다’는 농담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수평적 문화는 재판 무한 지연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법관 발탁의 디딤돌이던 고등부장 승진을 위해 과로를 일삼던 문화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법관에게 당근과 채찍을 구사하던 법원장과 행정처의 권한이 사라지면서 이제 재판의 속도와 질은 판사 개인의 의지와 양심에 달린 문제가 됐다. 부장판사가 배석판사를 끼고 가르치는 도제식 문화 역시 옛 풍경이다. 한 지법 부장판사는 “우리 부장 승진시킨다는 마음으로 밤새 일하던 시절 이야기”라며 “그 때는 승진 포기하고 일을 안 하는 부장들이 무능해보였다”고 말했다.

요즘 시니어 판사들에게서 “배석들이 부장보다 기록을 꼼꼼하게 안 읽는 경우가 많다” “좀 가르쳐주려 해도 ‘왜 참견이냐’는 식이라 눈치가 보인다”는 말을 듣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예전에는 배석들과 일하는 합의부장이 인기였지만 요즘엔 단독 재판부에서 혼자 일하는 걸 편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최근 화제가 된 ‘판결문 주3건 운동’, 즉 민사합의부 배석판사들이 주심 판결문을 한 주에 3건씩만 쓰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사법부가 겪는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법원 내부에서는 “젊은 판사들이 ‘워라밸’만 챙긴다”는 주장과 “3건도 야근하면서 겨우 해낸다”는 반론이 강하게 충돌한다. ‘주3건 운동’의 발단은 2019년 수원지법이 TF를 꾸려 연구한 ‘업무적정선’(한 주에 3.8~5.2건)이었다. 당근과 채찍을 치운 빈 공간을 메울 새로운 시스템을 제시하는 걸 김 대법원장과 행정처가 주저하자 지방법원 차원에서 자구책을 낸 것이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김 대법원장은 판사를 성직자 같은 사람으로 보고 특별한 인사 시스템 없이도 법원이 잘 돌아갈 거라 생각한 것 같지만, 판사 개인의 사명감에 기댈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며 “이대로라면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형해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근 없는 채찍이라도…평정 실질화해야”

 다수 전·현직 법관들은 그렇다고 모든 것을 김명수 코트 이전으로 되돌리는 게 사법부 동맥경화의 해법은 아니라고 말한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고법 부장 승진제 부활이나 법원장 지명제 같은 관료제적 방식으로 회귀해 풀릴 문제는 아니다”라며 “10년 주기 재임용 심사를 엄격하게 하는 등 판사들에게 긴장감을 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 고법 판사도 “현재는 근무평정 결과를 당사자에게도 잘 알려주지 않는다”며 “인사 평정 체계를 세부적·실질적으로 개편하고,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해 자극을 줄 필요가 있다”고 봤다.

 법조일원화 정책의 조정이 시급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사법시험 체제에선 ‘잘 뽑아서 가르친다’는 목표로 선배들이 후배 판사들을 길러왔지만 이젠 ‘다 자란 경력직’ 변호사들이 법복을 입고 있다. 경력 법조인들을 법관으로 선발하는 법조일원화 제도가 2013년부터 시행됐기 때문인데, 2025년부터는 법조경력 7년, 2029년 이후에는 10년 이상을 채워야 법관에 도전할 자격이 부여된다.

그러나 판사들은 “10년 경력을 쌓은 우수한 변호사들이 법원에 오겠느냐”고 반문한다. 외부 우수 인재에게 내보일 유인책이 마땅찮아 경력 법관 지원자는 감소 추세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변호사로 10년을 보냈다면 이미 훌륭하게 정착하고도 남을 연차인데, 급여가 크게 줄어드는 법원으로 오는 사람 중엔 ‘루저’나 ‘쉬러 오는 사람’이 여럿 끼어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고법판사는 “변호사로 오래 일했다고 판사에게 필요한 역량을 다 갖추는 건 아닌 만큼 경력 요건을 5년으로 유지하고 예비 판사 제도를 도입해 교육·평가 기간을 거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식 시니어 판사 제도나 연금 제도 등도 ‘인재 유인책’으로 거론된다.

판사 뺀 사법행정도 부작용 속출

 행정처 근무가 ‘승진 코스’로 인정되는 불문율을 없애기 위해 추진한 행정처 비(非)법관화 대책도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다. 양승태 코트 시절 30여 명에 달하던 행정처 파견 판사 수는 현재 10여명이다. 예전에는 임지 발령에 충분히 고려됐을 만한 사유들이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다 지난해에는 황당한 인사 사고도 일어났다. 제주지법에서 근무하던 판사 2명이 광주고법 제주원외재판부로 발령이 나 1심에서 심리한 사건들을 2심에서 또 맡을 수도 있는 상황이 빚어지자 행정처는 부랴부랴 인사발령을 취소했다.

지난 3월 이틀 동안 법원을 마비시킨 전산시스템 먹통 사태도 비법관화에서 원인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일로 일반직 전산정보관리국장이 최근 경질됐다. 일반 직원들에게선 “판사라면 잘랐겠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지만 판사들 사이에선 “판사가 맡았으면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판사들을 뺀 행정처를 채울 일반 직원들을 대거 차출하면서 일선 재판을 지원할 인력이 부족해졌다”고 말했다. 행정처 근무 경력이 있는 한 변호사는 “우수한 자원이 어려운 재판과 중요한 행정 업무를 맡게 해야 한다는 원론적 기준이 무너지면서 법원 운영이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며 “법원 내부의 좌우 갈등과 세대 갈등이 첨예해져 수습의 실마리를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수원·부산회생법원 개원에 따른 데이터 이관 및 신설 작업이 지연돼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5일까지 전국 법원 전산시스템이 멈췄다. 사건검색·공고·판결서 인터넷 열람 등 법원 홈페이지 서비스, 전자소송 홈페이지 서비스가 중단됐다. 사진 대법원 홈페이지 캡처

수원·부산회생법원 개원에 따른 데이터 이관 및 신설 작업이 지연돼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5일까지 전국 법원 전산시스템이 멈췄다. 사건검색·공고·판결서 인터넷 열람 등 법원 홈페이지 서비스, 전자소송 홈페이지 서비스가 중단됐다. 사진 대법원 홈페이지 캡처

5년째 맴도는 토론 주제가 있다…“호랑이에게 목 꼭 던져야 했었나”

2019년 2월1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공무상비밀누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등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연합뉴스

2019년 2월1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공무상비밀누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등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연합뉴스

2019년 2월 구속기소 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1심 재판만 4년 넘게 받고 있다. 9일까지 267번의 공판 기일, 13번의 공판 준비 기일이 열려 현재까지 '280번 재판'이라는 최다 기록을 세웠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주요 피고인들의 재판이 걸려 있는 상태에서 사법 신뢰 회복을 위한 제대로 된 발걸음을 떼기 힘들다. 일부 판사들은 시계를 5년 전으로 돌려 본다. 2018년 6월 김명수 대법원장이 “검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며 빗장을 풀어준 순간이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대법원 내부 조사 기구를 통해서도 충분히 많은 문제가 드러났던 상황”이라며 “키를 검찰에 쥐어 줄 이유가 없었다”고 짚었다. 수사가 시작되면서 법원 자체 징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까지 형사 재판의 공소사실이 됐고, 사건 마무리 시점이 지나치게 지연됐다는 취지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무리한 기소로 대다수 판사들에게 무죄가 선고됐지만, 그 결과(무죄)로 화살을 맞는 건 또 법원”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고법 판사는 “먼지털기식 수사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어 법원을 떠난 이들이 많다”며 “앞으로 법원을 짊어지고 갈 이들이 ‘사법농단 연루자’라는 오명을 써 안타깝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전·현직 법관은 66명, 그중 33명이 법복을 벗었다.

당초 문제를 제기했던 판사들은 “수사는 막을 수 없는 수순이었다”고 한다. 한 고법판사는 “수사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이들은 당시 상황과 맥락을 떠올리지 못한 채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지법부장판사도 “강제동원 재상고 사건 재판 거래 의혹까지 터져 나오니 믿을 수가 없었다”며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검찰 역시 법원 수사는 신중하게 접근하던 상황”"이라며 “법원이 스스로 냉정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을 법관들은 원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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