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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증언, 상반된 해석...물음표 커지는 ‘사법 농단=직권남용’ [280번의 재판,잊혀진 정의]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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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번의 재판, 잊혀진 정의③

사법부는 중증 동맥경화를 앓고 있다. 재판 지연에 분통을 터뜨리는 당사자들의 모습은 법원의 익숙한 풍경이다. 특히 1심 마비 증세는 심각한 수준이다. 2017년 사법농단 의혹이 제기된 이후 이어진 대법원장 구속과 판사 14명 기소라는 초유의 사태를 딛고 등장한 김명수 코트가 대법원장에 집중된 행정권력을 해체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인사상 '당근과 채찍'을 포기하자 법관사회에 들어선 수평적 문화는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박탈과 동전의 양면을 이뤘다. 그 사이 ‘무엇이 사법농단인가’를 가리기 위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1심 재판은 4년 넘는 기간 동안 280차례(14일 기준) 열렸다. 평가의 부재 속에 시행착오가 누적되면서 사법부는 표류 중이다. 3개월 뒤 대법원장이 바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왼쪽부터). 사진은 2020년 2월 재판 출석 당시 모습. 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왼쪽부터). 사진은 2020년 2월 재판 출석 당시 모습. 연합뉴스

“좀 더 나은 재판 시스템과 사법 환경을 만들어보려고 했습니다. (...) 설령 법원답지 못하다고 보이는 검토나 대처가 있었다 하더라도 행정조직 업무 성격을 감안하면 묵묵히 소임을 다하려 했던 분들을 탓할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 사법행정이 얼마나 선비처럼 고고해야 하는지 다각도 조망까지 바라진 않겠습니다만 검찰이 보는 것처럼 모든 사법행정이 법관들을 옥죄고 통제하려는 어두운 책략으로 물들어 있었는지 재판을 통해 최소한이라도 밝혀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2019년 5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첫 공판 날, 박 전 대법관이 한 말이다. 검찰은 300페이지가 넘은 공소장을 통해 양 대법원장 재임기간(2011년 9월~2017년 9월) 동안 이들이 주역인 22가지의 사건에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이하 직권남용)’라는 죄목을 달아 기소했다. 모두 당시 사법부의 지상과제였던 상고법원 도입 추진 도정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4년 넘게 280번 재판을 했지만, 어떤 것이 ‘좀 더 나은 재판 시스템과 사법 환경을 만들어보려 한 일’인지 어떤 것이 ‘어두운 책략으로 물든 일’인지에 대한 판단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김현서 디자이너

김현서 디자이너

향후 상고심까지 몇 년이 더 걸릴지 알 수 없는 3인방과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이민걸 전 기획조정실장 등 주변인물들에 대한 재판은 법원조직법상 사법행정의 총괄자인 대법원장과 그 보좌기관인 법원행정처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의 경계를 정하는 작업이다. 그 과정과 결과는 이미 같은 혐의(직권남용)로 고발된 김명수 대법원장의 운명에도, 신구·좌우 갈등 속에서 재판 지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차기 대법원장의 행동 양식과 활동 범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사건은 크게 사법행정권의 핵심인 인사권이 부적절하게 행사됐다는 의혹과 행정처가 개별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 두 갈래로 나뉜다. 전자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후자는 ‘재판 개입 의혹’이라고 불렸던 사건들이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직무 수행인가 직권 남용인가…“블랙리스트”vs“업무 문서”

4년째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진은 지난달 31일 265번째 재판에 출석하고 있는 모습. 김현동 기자

4년째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진은 지난달 31일 265번째 재판에 출석하고 있는 모습. 김현동 기자

 재판과정에서 블랙리스트 의혹 사건의 전선은 공무원으로서 정상적 직무 수행의 선을 넘었느냐를 둘러싸고 펼쳐져 왔다. 행정처가 ‘물의 야기 법관’에 대한 사실관계를 별도로 수집·검토해 이에 따른 인사조치를 내렸다는 의혹이 대표적이다.

행정처가 ‘물의 야기 법관’에 대한 인사조치를 별도로 검토한 것은 양 전 대법원장 재임 이전부터 해오던 일이지만,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 들어서 의견 표명과 정당한 비판까지 ‘물의’로 치부해 불이익을 줬다고 본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대해 부적절한 글 언론 기재’ ‘코트넷에 법원조직법 개정에 대해 부적절한 게시글’ 등을 이유로 ‘1순위 희망 임지 배제’ ‘지방 전보’같은 불이익을 준 건 대법원장이 인사권을 남용한 것이란 것이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은 “부당한 이유로 조치 검토한 적 없었고, 인사에 있어 고려할만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해 검토했던 것으로 기억하며, 대상 선정은 전적으로 실무자의 판단에 의했다”며 “이 같은 인사업무는 어느 조직에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사업무 처리방식”이라고 주장한다(지난 5월 3일 261차 공판에서 변호인의 말).

피고인들은 행정처 인사실을 거친 증인들을 상대로 “물의야기 법관 선발해 불이익한 조치를 하는 게 원칙적으로 인사권의 합리적인 행사 범위에 속한다는 취지냐(고 전 대법관 변호인)”등의 질문을 던져 “실무자로서 그렇게 이해하고 업무를 수행했다(노재호 전 인사심의관)”는 답을 구했다(2019년 11월 증인신문).

‘너무 나빠 무죄’인가 직권 남용인가…‘재판 개입’과 ‘월권’ 사이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재상고심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기간 내에 결론을 내지 못했고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인 지난 2018년 10월에야 결론이 나왔다. 사진은 선고 당일 당시 피해자 이춘식씨가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재상고심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기간 내에 결론을 내지 못했고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인 지난 2018년 10월에야 결론이 나왔다. 사진은 선고 당일 당시 피해자 이춘식씨가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재판 거래 의혹 사건에선 법리적 쟁점이 유·무죄를 가를 가능성이 크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대표적이다. 검찰은 일본 기업을 대리한 김앤장 법률사무소 압수수색해 얻은 ‘전합 회부의 근거+다른 대법관 설득의 무기로 외교부/법무부 의견서 필요(법원 동향)’ ‘외교부 장관→BH(청와대) 실장→외교안보ㆍ민정수석→법원행정처→대법원’ 등의 문건을 기소의 핵심 증거로 삼았다. 검찰은 양승태 대법원이 재상고심 재판에 개입해 박근혜 청와대가 원하는 대로 일본 기업 편을 들어주거나 최소한 선고를 지연하는 대가로 상고법원 도입 등을 얻어내려 했다고 본다.

양 전 대법원장 변호인은 지난달 31일 265차 공판에서 “대법원장을 비롯해 누구라도 판사 재판에 개입할 직무 권한이 없다는 건 확립된 판례”라며 “검찰은 헌법상 국민주권 원리라거나 사법행정이라는 큰 틀에서 광범위하게 일반적 직무 권한이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직권남용의 법리상 남용이 인정되려면 피고인의 행위가 법률 등에 의해 부여된 구체적인 직무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지난해 4월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은 임성근 전 판사가 서울중앙지법 수석부장판사 시절 3건의 재판에 대해 “부당하거나 부적절한 재판관여행위”를 했다고 판단했지만, “일반적 직무권한의 범위를 넘는 월권행위에 관하여는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법률 등에 의해 직무권한이 부여돼 있어야 그 남용도 가능하다는 그간의 판례를 그대로 적용한 결과였다.

이 같은 흐름을 바라보는 검찰의 시선은 곱지 않다. 수사에 참여했던 한 부장 검사는 “법원은 재판 개입에 대해선 유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며 “법관의 재판은 독립적이어야 하고 침해될 수 없다는 건 일종의 도그마기 때문에 어떻게든 무죄를 선고하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편향으로 내달린 김명수, 난제 떠안은 차기 대법원장

김명수 대법원장. 사진은 지난 5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후보에 앞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 뉴스1

김명수 대법원장. 사진은 지난 5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후보에 앞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 뉴스1

 사법농단 수사와 재판이 5년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법원은 달라졌다. 젊은 판사들도 말할 수 있는 수평적 문화와 함께 법관들의 격무도 줄었지만 그 대가로 재난 수준의 재판 지연과 판결 품질 저하 논란을 떠안았다. 사법농단 사태를 딛고 출범한 김명수 코트는 대법원장과 행정처, 그리고 그 권한을 위임받는 각급 법원장의 기능과 권한을 축소·해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양승태 코트 이전부터 문제였던 만성 상고심 적체, 법원 내 인사 적체 등의 과제는 손대지 못했다. 양승태 행정처를 비판했던 김 대법원장조차 직권남용 혐의로 수 차례 고발당한 상황이다. 탄핵 위기에 처한 판사의 사표를 “수리해버리면 탄핵 얘기를 못 하잖아”라며 받아주지 않은 것과 대법관 추천과정에서 측근을 통해 특정 후보를 “눈여겨보실 만 합니다”라고 한 것이 직권남용인지도 앞으로 밝혀야 한다.

공은 3개월 후 등장할 차기 대법원장에게로 넘어간다. 한 고등법원 판사는 “누가 와도 어려운 상황이 됐다”며 “인사제도 등 사법행정권이 발휘돼야 하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법관 독립이라는 가치 사이에 존재하는 기준선을 잡기가 너무나 어려워졌다”고 했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예전같으면 법원행정처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던 시스템 자체가 무너져 너무 먼 이야기가 돼 버렸다”고 했다.

또 다른 지법 부장판사는 “사법농단 이후 사법부는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며 “수평적 문화에 발맞춰 법원행정처를 폐지하는 수준으로 판을 새로 깔든지, 아니면 효율적인 관료제 구조로 회귀하면서도 법관 독립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든지, 둘 중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반면 양승태 코트와 김명수 코트를 지나며 사법부가 정반합의 발전 방향성을 찾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의견도 있다. “법원이 수직, 수평 문화의 부작용을 모두 경험했기 때문에 합리적인 선을 잘 찾아갈 수 있게 됐다”거나 “‘재판거래’ 의혹 등 사법농단 사태 자체가 하나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제시해둔 셈”이라는 등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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