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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출 긴급 진단] 반도체 빼면 대중 무역 수지 작년 이미 적자로 돌아서, 수출 고도화 ‘골든 타임’ 놓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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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호 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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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무역수지가 94억7000만 달러 적자를 기록, 4월부터 5개월째 적자를 이어갔다. 사진은 1일 컨테이너 하역작업이 진행 중인 부산항 신선대 부두. [연합뉴스]

8월 무역수지가 94억7000만 달러 적자를 기록, 4월부터 5개월째 적자를 이어갔다. 사진은 1일 컨테이너 하역작업이 진행 중인 부산항 신선대 부두. [연합뉴스]

‘구조적 변화’. 한국이 수출 주도형 제조 강국으로 도약한 이래 줄곧 따라붙던 말이다. 한국 수출이 지난 10여 년간 고공행진 하는 동안에도 중국 시장과 반도체의 과도한 편중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우려로만 그쳤던 경고는 중국 시장과 이른바 ‘반도체 착시’가 사라진 최근 현실화하고 있다. 4월부터 5개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가 누적되면서 건국 이래 사상 최대치(247억 달러)를 갈아치운 것이다. 에너지·원자재 가격 상승, 경기 둔화 등 악재가 겹치면서 일본이나, 독일 등 제조업 중심 수출 대국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지만, 한국 경제의 상황은 이들과 다르다. 더 이상 예전처럼 중국과 반도체에만 기댈 수 없다는 전망 속에 구조적 변화에 대응이 늦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기에 빠진 한국 수출을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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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시장 이상신호

32억 6800만 달러. 올 들어 8월 말까지 쌓인 대(對)중국 무역 적자 규모다. 지난 5월부터 4개월 연속 적자인데, 1992년 8월 한·중 수교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더구나 중국은 지난해 전체 무역수지 흑자의 82.9%를 담당했던 곳이라 타격이 크다. 이렇게 중요한 중국 시장이 급변한 배경으로는 최근 급격하게 꺾인 중국 경제성장률이 지목된다. 올 들어 중국 경제 성장이 급격히 둔화된 탓에 한국뿐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대만 등 주요국으로부터 수입 규모가 모두 줄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지난 2월부터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이 감소하기 시작했고, 일본과 대만도 각각 3월과 6월 감소세로 돌아섰다.

문제는 최근 한국과 중국의 교역 구조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터라 다른 국가들과 상황이 다르다는 점이다. 중국 경기 둔화 전망에 주요국들의 중국 수출도 감소세로 돌아섰지만, 미국과 일본 등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의 대중 수출 감소 폭은 상대적으로 양호하다. 예컨대 반도체 제조장비만 놓고 봐도 올 상반기 한국의 대중 수출 규모가 전년 동기 대비 51.9%나 줄어든 반면, 일본과 미국의 수출 감소 폭은 각각 15.3%, 13.2%에 그쳤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에 중국 시장 부진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금까지 한국은 중국에서 ‘원재료’를 수입해 가공한 뒤 ‘중간재’를 수출해 왔다. 그런데 한국의 중간재 수출 감소세는 가파른 반면, 핵심 소재의 중국 의존도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훈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북경사무소장은 “최근 무역수지 적자는 한국 기업들이 갑자기 중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중국경제가 차근차근 고도화한 결과”라며 “중국 정부가 경기 부양에 나서고 있어 단기적으로 중국 내 경기는 개선되겠지만, 한국이 과거처럼 큰 폭의 흑자를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중국에서 수입하는 소재 의존도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김회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1000만 달러 이상 수입품 가운데 중국 의존도가 75% 이상인 품목은 178개로 절반(52.5%)이 넘는다.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용 핵심 소재 수입액은 급등세다. 수산화리튬 수입액은 올 상반기에만 404% 증가했다. 원자재 공급망을 다변화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중국과 무역에서 이익 구조가 바뀔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홍지상 무역협회 동향분석실 연구위원은 “향후 중국으로부터 무역흑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핵심 소재의 수입선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수출효자’ 반도체도 적신호

한국의 수출 효자 상품인 반도체도 적신호가 들어왔다. 지난 8월 반도체 수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7.8% 줄어든 것이다. 반도체 수출 증가율은 올해 5월 14.9%에서 7월 2.1%까지 낮아지더니 기어이 역(逆)성장한 것이다. 이 영향으로 8월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사상 최고치인 94억7000만 달러를 찍었다. ‘반도체 착시’가 사라지면서 한국 수출의 민낯이 드러난 셈이다. 현상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국경제통상팀장은 “무역수지에 있어 반도체 의존도가 높은데 대중 무역수지만 하더라도 반도체를 제외하면 2021년에 이미 적자로 전환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반도체 수출 부진이 단기간 해소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메모리반도체는 스마트폰이나 가전제품에 들어가는데, 관련 업체들이 지난해부터 재고 확보에 열을 올린 데다 최근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면서 당분간 수요가 위축될 것이란 전망이다. 실제로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재고율(재고량/출하량)은 125.5%로 2020년 5월 이후 최고치다. 황민성 삼성증권 연구원은 “메모리반도체인 D램과 낸드플래시의 재고는 각각 10주, 14주 수준이 쌓여 있어 지금부터 생산량을 조절한다 해도 올해 연말까지 반도체 시장 수급에 영향을 주기는 어렵다”며 “내년 경기 우려에 재고 소진 속도는 더 늦어질 수 있어 2024년까지 계속 생산을 제한해야 가격이 안정화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메모리반도체 자급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지난해 기준 한국 반도체 수출액의 40%(홍콩 포함하면 60%)를 가져가던 최대 고객인데, 최근 메모리반도체 기술 격차를 무섭게 좁히고 있다. 중국 반도체 업체인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는 지난 7월 ‘196단’ 낸드플래시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시장에선 중국 업체의 품질을 의심하곤 했지만 최근 애플이 YMTC 128단 낸드플래시를 아이폰14 등에 탑재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2024년 이후 메모리반도체 수요가 살아나더라도 중국에서 대규모 흑자를 내는 교역 구조가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문가들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한국 수출의 위기는 단기간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만큼, 수출 품목의 경쟁력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봉수 단국대 무역학과 교수(한국무역학회장)는 “최근 글로벌 경제 상황은 공급망 혼란과 비용 상승을 유발하고 있어 한국경제는 당분간 무역적자가 지속될 것”이라며 “한국은 이미 중국에게 메모리반도체는 물론, 일부 품목에서 추월을 허용한 상황이라 향후 중국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시간이 필요한 수출 다변화

수출 품목도 문제지만, 수출 시장 다변화도 늦어지고 있다. 이전 정부가 2018년부터 ‘신남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신남방국가(아세안 지역 10개국+인도)가 한국의 2위 교역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들 나라와의 교역액은 지난해 사상 최대치인 2002억 달러를 기록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거둬들였던 무역 흑자를 신남방국가로 대체하기에는 부족하다. 최인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동남아·대양주 팀장은 “40년 이상 이 지역에 공들인 일본이나 미국 등을 제치고 한국 기업들이 4년여 만에 시장 판도를 뒤집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아세안 지역 국가들도 미·중 갈등 속에 새로운 파트너가 필요한 상황이라 장기적인 목표를 갖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관건은 정책의 연속성이다. 현 정부에선 지난 5월 ‘인도·태평양 전략’ 수립을 천명하면서 ‘신남방정책’이란 용어가 자취를 감췄다. 대신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큰 틀에서 아세안 지역과의 관계를 강화하겠다는 방침인데, 현지에선 정책의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국내 기업의 말레이시아 현지 주재원은 “올해 정권이 교체되면서 신남방정책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궁금해 하는 현지 업체가 많다”며 “한국 정부가 아세안 지역 국가들과 지속적으로 협력하겠다는 분명한 메시지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제 유가가 고공행진하면서 ‘오일 달러’가 쌓인 중동 지역도 수출 다변화에 기여할 만한 지역으로 손꼽히는데, 이 지역에서도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최근 들어 자동차와 선박 등 수출이 늘었다곤 하지만 이 지역 수출의 핵심은 원전과 플랜트인 탓이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동욱 무역협회 중동지부 과장은 “자동차나 선박 수출이 많이 늘었다고 하는데 이는 코로나19 확산을 전후로 주춤하던 게 반등한 것”이라며 “한국의 대중동 수출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원전과 플랜트인데 아직 이 시장은 살아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난달 한국수력원자력이 총 사업비 300억 달러 규모의 이집트 엘다바 원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데 성공하면서 원전 수출에 다시 ‘파란불’이 들어왔다는 점이다. 원전·플랜트의 유지·보수 계약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10년 정도면 끝나는 원전·플랜트 건설보다 유지·보수 계약을 따내면 적어도 40년간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대한화학회 탄소문화원장)는 “한국은 2019년 아랍에미리트에 바라카 원전을 성공적으로 완공시키며 실력을 인정받았는데, 전 정부의 탈원전 정책 탓에 정작 바라카 원전의 유지·보수 계약은 프랑스 기업들이 가져갔다”며 “한국 기업이 유지·보수 계약을 다시 쌓아갈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 정부는 그동안 뭐했나

중국 시장과 반도체가 제공하던 착시가 사라진 한국 수출이 부진한 또 다른 원인으로는 ‘환율 효과’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동안 한국경제가 부진에 빠지고 달러당 원화값이 떨어질 때마다 가격 경쟁력을 높여 수출이 늘던 환율 효과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과거와 달리 달러 가치가 전 세계 주요국 통화 대비 모두 강세를 보이자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만 개선되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 같은 모습 역시 구조적 변화 때문이란 지적도 나온다.

한국경제 보다 먼저 변화를 겪는 일본 역시 원화 가치가 낮아진 뒤에도 무역수지가 개선되지 않아 ‘나쁜 엔저’라는 비판이 인 바 있다.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강의 교수는 “글로벌 공급망 확보 차원이나 노동 비용 문제 등으로 일본 기업이 해외로 나가 버리고, 엔화 가치가 낮아져도 일본으로 복귀하지 않으면서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며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 투자하더라도 핵심 기술은 국내에 축적하고 소재와 부품, 장비를 수출하도록 해야 흑자가 지속된다”고 말했다.

구조적 변화 속에 한국 수출이 새로운 흑자 구조를 완성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정부의 안일한 대응을 지적한다. 올해 초 두 달 연속 무역적자가 발생했을 당시 정부에서는 계절적 요인 등으로 인한 ‘일시적’이란 해석을 내놓은 탓이다. 지난 2월 1일 산업통상부에서 발표한 ‘2022년 1월 수출입동향’에선 무역수지 적자의 원인으로 “에너지 가격 급등과 동절기의 높은 에너지 수요 등 계절적 요인으로 에너지 수입이 크게 늘었다”며 “우리와 산업구조가 유사한 일본과 프랑스도 최근 큰 폭의 적자가 발생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 설명은 ‘8월 수출입동향’에도 계속되고 있다. 에너지 가격 변동은 관련 전문가들도 맞추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일시적’일 것이란 기대에 대응할 시간을 허비했다는 지적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내 금융사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겨울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일시적으로 무역수지가 악화됐다는 설명이 나왔는데 어느새 다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며 “정부의 안일한 상황 판단으로 수출 시장의 구조적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못하고 있고, 이게 자칫 한국경제에 치명타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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