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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출 긴급 진단] 에너지·공급망 대란 유럽·아시아 휘청…한국 수출시장 가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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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호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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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외식 업체 매장에 붙은 구인 안내문. 아래 사진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잡페어(취직 설명회)에 참가한 청년들. 미국은 최근 실업률이 3.7%로 여전히 낮은 수준인 반면 중국은 청년(16~24세) 실업률이 사상 최고치인 19.9%를 기록했다. [AP=연합뉴스]

미국의 한 외식 업체 매장에 붙은 구인 안내문. 아래 사진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잡페어(취직 설명회)에 참가한 청년들. 미국은 최근 실업률이 3.7%로 여전히 낮은 수준인 반면 중국은 청년(16~24세) 실업률이 사상 최고치인 19.9%를 기록했다. [AP=연합뉴스]

한국 수출이 어려움에 봉착한 건 세계 경제가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다. 기록적 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통화 긴축, 우크라이나 사태와 공급망 대란 등이 연쇄 작용을 일으키면서 경기 침체 우려가 커졌다는 점에선 각국 상황이 같다. 그런데 ‘미국 대 나머지’의 구도라고 할 만큼 세계 1위 미국 경제는 상대적으로 선방하고 있는 반면, 2~5위인 중국·일본·독일·영국 등 동아시아·유럽 주요국 경제는 극심한 고통과 위기에 처해 있다. 문제는 한국의 대(對)미 수출 비중이 전체의 15% 정도에 그친다는 점이다. 한국 수출시장은 그나마 경제 상황이 괜찮은 미국보다 그렇지 않은 나라를 향해 훨씬 많이 열려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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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외식 업체 매장에 붙은 구인 안내문(위 사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잡페어(취직 설명회)에 참가한 청년들. 미국은 최근 실업률이 3.7%로 여전히 낮은 수준인 반면 중국은 청년(16~24세) 실업률이 사상 최고치인 19.9%를 기록했다. [AFP=연합뉴스]

미국의 한 외식 업체 매장에 붙은 구인 안내문(위 사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잡페어(취직 설명회)에 참가한 청년들. 미국은 최근 실업률이 3.7%로 여전히 낮은 수준인 반면 중국은 청년(16~24세) 실업률이 사상 최고치인 19.9%를 기록했다. [AFP=연합뉴스]

세계 경제의 미묘한 디커플링(탈동조화)은 주요 경제지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2분기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0.6%(전분기 대비 연율 기준)였다. 같은 기간 중국은 전분기 대비 0.4%, 일본은 0.5%, 독일은 0.0%, 영국은 -0.1% 성장했다. 단순히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미국의 마이너스(-) 성장이 가장 심각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 미국의 연간 성장률은 5.7%였다. 중국은 8.1%, 영국은 7.4%다. 낙폭은 중국·영국이 훨씬 큰 셈이다. 특히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 중국은 G2(주요 2개국)이자 미국과 맞상대할 만한 유일한 경제대국으로 21세기 내내 성장세로 미국을 압도했던 나라다. 그럼에도 올해 2분기 0.4%라는 초라한 성장률을 기록했다. 일본과 독일도 지난해 각각 1.6%, 2.9%로 성장률이 워낙 저조했기에 올 2분기 성장률은 심각한 수준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충격 이후 크게 반등했던 미국과 달리, 2년여 간 이렇다 할 반등 없이 부진만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독·영 금융위기 이후 최악 경제 상황

각국의 경기 불황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고용지표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올 7월 실업률은 3.5%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이자 미국 역사상 가장 낮았던 2020년 3월 수치와 동일하고, 비(非)농업 일자리 수도 52만8000개나 증가했다. 8월 실업률도 3.7%로 낮은 편이다. 반면, 중국은 7월에 도시 실업률이 5.4%였고 청년(16~24세) 실업률은 19.9%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독일의 7월 실업률도 5.5%에 달했다. 일본은 미국보다 낮은 2.6% 실업률을 기록 중이다. 하지만 일본은 고령화 진행 속도가 경쟁국에 비해 빠르고 경제활동인구 비율이 떨어져 실업률이 경제 상황과 무관하게 좋아 보이는 착시를 일으킨다는 분석이 많다.

이 때문에 각국의 최근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미국은 향후 ‘경제 위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고용시장이 매우 강력한(strong) 상황에서 경제가 침체라는 건 말이 안 된다”며 “경제에서 많은 영역들이 아주 잘 수행되고 있다”고 강조할 만큼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이 중국·일본과 달리 금리 인상의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것도 견딜 수 있는 경제 상황이라고 ‘낙관’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주요 외신이 독일과 영국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경제 상황에 처했다고 묘사 중인 것과도 대조된다. 무엇이 이런 디커플링을 유발하고 있을까.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우선 현재 상황이 제조업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 한층 치명상을 입혀서라는 분석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공급망 대란이 이어지고 제조업 생산에 필수인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다”며 “이는 제조업에 그만큼 큰 타격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원자재 가격은 올 상반기 기록적인 폭등 이후 경기 침체 우려에 따른 수요 둔화 기미에 안정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최근엔 공급 감소 우려에 다시 오르고 있다. 광물의 경우 유럽과 중국의 제련 업체들이 올 여름 전력난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으면서 강한 가격 상방의 압력을 받고 있다. 국제 유가도 사우디아라비아의 감산 가능성에 상방 압력이 강해졌다.

제조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가졌으면서 자원 보유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일본·독일은 여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특히 독일은 세계 최대 천연가스 생산국인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사태 직전까지 천연가스 사용량에서 러시아산 비중이 55%에 달할 만큼 의존도가 높았다. 그런데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무기화, 서구권의 제재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천연가스 공급을 줄이면서 에너지 대란에 직면했다. 지난달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러시아의 천연가스 감산에 독일 내 전력·천연가스 가격은 두 달 사이 2배 넘게 급등했다. 이에 독일 내 수많은 제조 기업들은 공장 가동에 애를 먹고 있다.

일본은 공급망 대란과 원자재 가격 외에도 인구 고령화에 따른 제조업의 만성적 인력 부족 문제가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질적인 내수 소비 침체도 비슷한 이유로 풀이된다. 중국은 제조업 의존도가 높지만 자원 보유량이 풍족하고, 러시아와의 사이도 돈독해 일본·독일 수준의 어려움은 피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과의 계속된 패권 경쟁 과정에서 세계 각국의 탈(脫)중국 행보가 가속화해, 그간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한 최대 무기였던 ‘세계의 공장’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통과로 2024년부터 전기차 분야에서 중국산 배터리 또는 양극재와 리튬 등의 원자재를 규제하는 데 나섰다.

이어 유럽연합(EU)도 원자재법(RMA) 도입을 추진하면서 리튬과 코발트 등의 중국산 수입 비중을 최소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뿐 아니라 중국에 진출했던 각국 기업들은 공장을 자국이나 동남아의 다른 나라로 속속 옮기고 있다. 중국의 굳건한 버팀목이었던 내수 시장도 국내총생산(GDP)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부동산 경기 침체와 ‘제로 코로나’ 정책에 따른 소비 침체 악순환을 겪으면서 휘청거리고 있다. 영국은 브렉시트(EU 탈퇴) 이후 계속된 노동력·공급망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지에선 수년째 브렉시트라는 악수(惡手)가 국가 성장 동력을 망가뜨렸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들 나라와 달리 미국은 애플·구글·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로 대변되는, 경기 민감도가 낮고 공급망 대란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소프트웨어 중심의 정보기술(IT) 산업 경쟁력이 막강하다. 또 미국엔 제조업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자원도 풍부하다. 미국이 경제 침체 우려 국면에서 유독 강력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이유다. 여기에 최근 눈에 띄는 달러 강세가 미국 경제의 하방 압력을 줄여주고 있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미국 달러의 평균 가치를 나타내는 지표인 ‘달러인덱스’는 최근 109선을 넘어서면서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경쟁국 대비 인플레이션 공습으로부터 심각한 내수 침체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사태 종식 같은 특단의 이벤트가 없는 한, 미국 경제와 다른 주요국 경제의 디커플링이 쉽게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올 2분기 0.7%의 낮은 성장률을 기록했고, 자원 빈국이지만 제조업 의존도가 높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산업연구원은 지난 4월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로 원자재 가격 상승이 이어지면서 한국의 제조업 전체 생산비용이 최고 6.7% 오를 수 있다”며 “기업들의 부담이 가중돼 기본 시나리오(미국의 강력한 대 러시아 제재와 유럽의 소극적 참여)상 국내 제조업의 실질 수출이 1.18~3.55%포인트 줄어들 것”으로 분석했다.

일본은 고령화로 만성적 인력 부족

한국은 지난달 사상 최대 규모의 무역수지 적자(94억7000만 달러, 약 12조8000억원)로 비상등이 켜졌다. 무역수지 적자가 5개월째 이어진 것도 금융위기 이후 14년 만이다. 미국의 경제 상황이 아직은 생각보다 양호하게 보인다고 해서 우리나라까지 막연히 낙관하는 ‘오판’을 해선 안 되고, 외려 중국·일본 등의 최근 상황에서 강한 위기감을 공유해 수출·수입선 및 공급망 다변화와 핵심 원자재 비축량 증대, 주력 산업 다각화 등에 힘쓸 때라는 분석이다. 박광기 뉴패러다임미래연구소장은 “한국 경제는 수출 의존도가 70%대에 달해 GDP가 ‘수출 증가→투자 증가→내수 소비 증가’의 순환으로 성장하는 구조”라며 “글로벌 환경 변화에 경제가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더구나 미국의 경제 위기도 이제 진입 단계일 뿐이라는 분석 역시 만만찮다. 스티브 한케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지난달 말 외신 인터뷰에서 “내년 미국에 엄청난 경기 침체가 올 것”이라며 “인플레이션도 2024년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스티븐 로치 예일대 석좌교수도 “미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가 적어도 2024년까지 침체 국면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말했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은 내수 소비가 전체 GDP의 70% 이상을 차지한다”며 “금리 인상이 가팔라질수록 가계가 못 버티고 소비를 줄여 경기가 나빠지는 악순환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도 강한 위기감을 놓지 않고 글로벌 상황을 주시해 대책 마련에 전념할 때라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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