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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출 긴급 진단] 통화가치 하락에 인플레만 가중, 세계는 지금 ‘환율 딜레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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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호 10면

SPECIAL REPORT 

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1354.9원)보다 7.7원 상승한 1362.6원에 마감했다. 금융위기 이후 첫 1360원을 돌파했다. [뉴시스]

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1354.9원)보다 7.7원 상승한 1362.6원에 마감했다. 금융위기 이후 첫 1360원을 돌파했다. [뉴시스]

수출입 시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변수는 환율이다. 보통은 달러 환율이 오르면(자국 통화 가치 하락) 달러로 받은 수출대금을 환전할 때 환율이 오른 만큼 기업의 수익 개선으로 이어지고, 수출 시장에서는 가격 경쟁력이 생겨 수출이 증가한다. 그래서 정부가 개입해 인위적으로 자국 통화의 약세 기조를 유지하기도 했다. 수출 증대를 목적으로 한 이른바 ‘환율전쟁’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 같은 통념이 먹히지 않는다. 당장 한국만 해도 상반기부터 원화 가치 하락세(환율 상승)가 이어지고 있지만, 수출 증가세는 되레 꺾였다. 1월 15.2%이던 수출 증가율(전년 동기 대비) 6월 5.4%를 시작으로 3개월 연속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수출기업의 체감 경기 역시 하락세다. 지난달 수출기업(제조업)의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83으로 7월보다 2포인트 하락해 2020년 10월(82)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5월(97)이후 3개월 연속 하락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10년간(2003~2021년) 장기평균치(83) 수준으로 원화치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는데도 수출기업들이 피부로 느끼는 효과가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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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가치 하락이 수출 시장에서 먹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세계 경기 침체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 세계 경제가 안 좋아지고 있고, 특히 반도체 수요 감소 등으로 전반적인 수출 시장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강(强)달러’ 영향으로 주요국의 통화 가치가 동시 하락하고 있는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원화 가치는 지난 1일 달러당 1355.82원으로 연초 1191원 대비 12% 하락했지만, 일본의 엔화 가치는 같은 기간 더 떨어졌다. 연초 달러당 115.32엔 선이었던 엔화는 지난 1일 연초 대비 17.8% 하락한 140.2엔을 기록했다. 24년 내 최저치를 기록했다.

강달러에도 꿋꿋하게 버티던 중국의 위안화도 최근 약세가 이어져 현재 달러당 7위안 수준에 머물고 있다. 연초 대비 8% 하락한 것으로, 2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유로화 역시 연초 대비 11.9% 하락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원화 가치의 하락 폭이 커지고 있는 데도 거듭 “우려할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래서다. 강달러 기조 속에 주요국의 통화 가치가 모두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특히 한국과 수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일본과 중국, 대만의 통화 가치가 동시에 하락하고 있어 우리 기업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되고 있다. 세계 수출 시장에서 한국의 최대 경쟁국인 일본은 주요국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는 상황에서도 ‘엔저(底)’ 유지를 위해 금리 인상을 미루고 있다. 지난달 27일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 중앙은행 총재는 미국 잭슨홀 패널 토론 이후 질의응답 시간에 “우리는 임금과 물가가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수준으로 오를 때까지 금융 완화를 계속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며 긴축 기조에 합류하지 않을 것이란 의사를 내비쳤다. 당분간 엔저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의미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의 수출경합도지수는 2021년 기준 0.458로, 2010년 0.475보다는 낮아졌지만 여전히 다른 나라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수출경합도는 1에 가까울수록 무역 구조가 비슷해 경쟁이 심하다는 의미다. 신 교수는 “최근의 원화 가치 하락이 수출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시기는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라며 “그러나 엔화 약세가 장기화하면 우리 기업에 타격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출경합도가 높은 제품은 잘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다음으로 수출경합도가 높은 중국·대만의 통화 가치는 원화와 비슷하거나 원화보다 덜 떨어졌지만, 문제는 중국·대만은 한국이 가격경쟁력으로 승부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김경훈 한국무역협회 동향분석실 연구위원은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수출품질이 우수해 수요가 높은 경우 위안화 약세가 우리나라 수출에 미치는 영향은 적다”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나 기업으로선 원화 가치 하락이 반갑지 않다. 수입 물가만 끌어 올려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에 기름을 붙고 있다. 특히 원유 등 원자재 가격 상승과 맞물려 한국의 무역수지를 갉아 먹고 있다. 국제무역통상연구원에 따르면 국제 유가와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할 경우 수출단가는 0.04% 오르고, 수출물량은 0.01% 감소해 수출금액은 0.03% 증가에 그친다. 반면 수입금액은 3.6%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원화 가치 하락은) 무역적자 확대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건형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기업이 해외 생산 시설을 늘리는 등 산업구조도 많이 변화했기 때문에 이전처럼 (원화 가치 하락에 따른) 수출 경쟁력이 강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한국은행은 물론 대통령실, 경제부총리·금융당국까지 원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나서고 있다. 방기선 기획재정부 1차관은 지난달 29일 열린 시장 상황 점검 회의에서 환율과 관련 “시장에서 과도한 쏠림 현상이 나타날 때를 대비해 시장 안정을 위한 정책적 노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달러당 1340원이 깨진 지난달 23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달러화 강세와 원화 약세의 통화 상황이 우리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비상경제 민생회의 등을 통해 리스크 관리를 잘 해가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중국도 위안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나섰다. 중국 외환당국은 최근 자국 은행들에 공세적 위안화 매도에 대해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24일 “중국당국이 최근 위안화 급락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있음을 은행 측에 암시했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22일 또 다시 ‘1유로=1달러’ 패리티가 깨진 유럽연합(EU)도 환율 방어 수단 찾기에 나서고 있다. 주요국들이 자국의 통화 가치를 올리는 ‘역(逆)환율 전쟁’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권아민 연구원은 “통화 가치가 하락하면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져 신흥국은 금융위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며 “과거와 달리 통화 가치 하락이 수출에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나라마다 통화 가치 하락을 막기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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